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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걸음을 하였다지.
-계절이 바뀌는지도 몰랐는데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더이다.
왕은 표정이 한결 밝아진 듯한 윤을 품에 안고 달콤한 체향을 깊이 들이마시다 그대로 잠을 청했다. 후원에서 오수를 즐긴 덕에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데룩데룩 굴리며 귓가에 퍼지는 왕의 숨소리를 듣던 윤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따뜻한 햇살에 눈을 뜨니 이미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평소와 달리 몸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았지만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방문 쪽을 돌아보는 순간 하루 가까이 잊고 있던 무사가 떠올라 금세 마음이 무거워졌다.
후원 안으로 발을 옮기던 윤은 그대로 멈추어 선 채 한참을 망설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입구에 선 이를 손짓해 불렀다. 어제와 다름없이 이리저리 둘러보는 윤의 뒤를 무사가 소리 없이 따른다. 눈은 앞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온 신경이 뒤에 쏠렸다. 옅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주위에 가득한 화초들도 어제보다 더 진한 향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말 한마디 없는 둘만의 산책을 즐기기를 수차례. 새소리만 들리던 후원 안에 언제부턴가 윤의 목소리도 울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푸르구나, 꽃이 향기롭다, 따위의 굳이 답을 요하지 않는 독백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무사도 가끔은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가까이 와보게.
풀밭에 누워 따스한 햇살을 음미하던 윤이 두어 걸음 떨어져 있는 이에게 말을 건넸다. 옆에 단정히 무릎 꿇은 무사의 길쭉한 목에 제가 만든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한참을 빤히 바라보는 저 때문에 눈 둘 곳을 몰라 하던 그가 약간 붉어진 듯한 얼굴을 살며시 돌렸다. 손을 들어 살짝 매만지자 뻣뻣하게 굳은 목이 금세 새빨갛게 물이 든다. 푸스스 웃은 윤은 목에 닿았던 손을 눈앞에 내밀었다.
-일으켜주게.
그의 목에 닿았던 손끝이, 내밀어진 팔을 잡았던 손바닥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처소로 돌아온 후에도 윤은 한참이나 제 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미지근한 저와 달리 잠깐 닿았던 그의 체온은 높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뜨겁진 않을 테다. 손을 볼에 대었다. 열기가 어느새 위로도 옮겨간 모양인지 뜨겁긴커녕 따뜻하단 느낌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둘의 거리는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다. 감히 그럴 수 없다 만류하던 그도 더 이상은 마음을 숨기기 힘든 모양이었다. 함께 연못에 손을 담그기도 하고,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마주 앉아 한없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날도 있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리 웃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아 어색하기도 했지만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늘 입끝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냉정한 윤도 무뚝뚝한 그도 후원 안에서만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옆에 누워 흉터가 옅게 남은 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곤 깊숙한 소매를 뒤졌다. 그러더니 의아한 표정을 한 윤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제가 가진 것들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모양의 동곳을 본 윤의 눈이 깜빡이는 걸 잊은 듯 한참 동안 멍하게 뜨여 있었다.
-보잘것없지만 제 마음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단호했다. 왕이 아무리 진귀한 것들을 하사해도 본체만체했던 윤이 그 소박한 선물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촉촉한 눈을 들어 올려 강렬한 눈빛을 응시하던 윤은 입술을 그의 입에 스치듯 맞대고 놀라 굳어 있는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보잘것없지만 내 마음이네.
-그리 좋더냐? 내 그 후원에 상이라도 내려야겠구나.
나날이 밝아지는 제 안색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왕을 볼 때마다 윤은 가슴 한 편이 무거워졌다. 불편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예전과 달리 사근사근하게 굴자 바뀐 태도가 마음에 든 왕은 회임 후에 풀어주겠다던 족쇄를 직접 끊어주었다. 속내를 들키기라도 할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껏 숨 쉬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은 후원에서 그와 함께 할 때뿐이었다.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힘겹게 왕의 욕정을 받아내는 동안에도 눈을 감고 그를 떠올리면 버틸만하였다.
-그 요망한 것이 요즘에는 얌전히 군다지.
-전하께옵서 크게 기꺼워하시고는 족쇄까지 풀어주시었다 하옵니다.
-이러다 덜컥 회임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지밀상궁이 전하는 빈의 소식에 중전은 날이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졌다. 왕의 총애를 한사코 거부하여 몸 성할 날 없던 놈이 족쇄까지 차 짐승 같은 신세가 된 것에 안심했던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음을 돌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봄바람처럼 살랑거린다 하였다. 다행히 아직은 기미가 없으나 왕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는 그 천하디 천한 몸에서 원자라도 생산되는 날엔 제 처지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전히 간택된 합방 일마다 왕이 교태전에 들기는 하였지만 회임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원자가 세자가 될 것이 자명하니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여 오만방자한 빈 따위의 눈치나 보며 남은 생을 이어가야 할 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고개를 내저은 중전은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지밀상궁의 귀에 힘주어 속삭였다.
말캉한 입술을 혀로 할짝거리던 이가 저고리 안으로 슬쩍 손을 넣었다. 흠칫하는 가슴을 살살 쓸어내리나 싶더니 금세 힘을 주어 주무르기 시작한다. 윤은 입꼬리를 양옆으로 당긴 채 달콤한 숨을 내뿜었다. 겹겹이 걸친 옷을 하나씩 풀어헤친 그가 하얗게 드러난 속살 여기저기에 입을 갖다 댄다. 간지러워 작게 소리 내어 웃던 윤이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 소리에 호흡을 멈추었다. 제 위로 쓰러진 그의 옆구리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밀어내려 힘을 주었지만 단단하게 버티고 드는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에 입술을 부딪친 윤이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고는 순식간의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무사의 앞을 막아선 윤에게 활을 겨눈 왕이 태연히 물었다.
-어허, 윤아. 짐에게 검을 들이댈 셈이냐?
-마마, 위험합니다.
안타깝게 외치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윤은 왕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의복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몸을 향해 화살은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세번째 활시위를 당기다 말고 왕은 줄지어 선 병사들을 손짓해 불렀다. 비장한 표정으로 이를 악무는 윤의 얼굴이 지척인 듯 또렷이 보였다. 왕이 옆으로 물러나자 십여 개의 화살이 줄지어 쏟아졌다. 힘겹게 쳐내던 윤의 뺨이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화살에 긁혀 주르륵 피를 흘려내었다.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가 앞으로 뛰어나와 바닥에 엎드려 사정했다.
-전하, 모두 소인의 잘못이니 제발 저의 목만 거두어 주시옵소서. 제가 강제로 마마를 능욕한 것입니다.
-내 너를 철석같이 믿고 빈을 맡겼건만,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불만이 없겠구나.
무심한 말투와 다르게 성큼성큼 다가와 당장이라도 쏠 태세로 활을 겨눈 왕의 앞에 무릎 꿇은 윤이 용포 자락에 매달렸다.
-아닙니다, 전하. 소인이 싫다는 이를 억지로 붙들어 입을 맞추고 스스로 옷을 벗은 것입니다. 제발 저를 벌하소서. 저자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다...?
간절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윤에게 한참 동안 시선을 주었던 왕이 몸을 굽혀 상처 난 뺨을 천천히 쓸었다.
-죄 없는 자가 억울하게 벌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이지. 걱정 말거라 윤아, 내 저놈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으마. 짐을 위해 여러 번 목숨을 바쳤던 이다. 그런 자가 배신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살짝 입 맞춰준 왕이 안심하라는 듯 작은 뺨을 톡톡 두들기기 시작했다. 점점 가해지는 힘에 흔들리던 윤은 수차례 이어진 거센 타격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뉘었다. 손에 질척하게 묻어난 피를 쓰러진 윤의 맨 가슴에 문지르던 왕이 뭐라 뭐라 외치는 무사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명을 내리고는 후원을 나섰다.
-저놈은 의원에게 보이고 빈은 옥에 가두라.
윤이 아랫것들을 모두 물린 채 후원에 늘 홀로 들고 무사만이 그 안을 지키고 있다 하였어도 왕은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 마음속에 제가 없어도 정을 주고 살을 섞다 회임을 하고 나면 결국 윤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그 시기가 앞당겨지기라도 한 것인지 언제나 날을 세웠던 윤의 한결 누그러진 태도에 왕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침 타국에서 들여온 귀한 화초도 전할 겸 몰래 놀래주려 후원을 찾았더니 입구에 있어야 할 무사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스쳐가는 섬뜩한 기운에 급히 병사들을 대동하고 안으로 발을 옮기자 저 멀리 풀밭에서 검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심복 중에서도 가장 믿을만한 이라 여겨 붙여주었건만 그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인영은 분명 윤이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은밀히 소식을 전해 들은 중전은 급히 대전으로 향했다. 결국 그 천한 놈이 피를 숨기지 못하고 무사 따위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단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숨긴 중전은 거친 호흡을 고른 후 제 등장을 알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분노에 휩싸여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태연히 상소를 훑어보는 왕의 모습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전하, 후궁의 부정이라니요.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숲에서 빈에게 쏘았던 화살, 사실은 짐을 노린 것 아니었소?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제가 어찌 전하를...
-내 설마설마했건만 역시 그대가 맞았구려. 허울뿐인 중전 자리라도 지키고 싶으면 빈의 일 함구하는 게 좋을 거요. 짐은 정사가 밀려 바쁘니 그만 물러가시오.
중전은 휘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대전을 채 나오기도 전에 쓰러졌다. 빈을 쳐내긴커녕 자백한 꼴이 되었으니 이제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였다. 역모로 몰아 가문을 몰살해도 모자랄 지경이건만 그저 입만 닫으라는 걸 보면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절대 빈을 내칠 생각이 없단 뜻이었다. 신중하지 못했던 제 행동을 이제 와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분노와 자책이 뒤섞인 눈물이 볼을 뜨겁게 적셨다.
왕은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옥사로 발을 옮겼다. 갇혀 있던 윤을 끌어내어 매달라 명하고는 제대로 먹고 자지 못해 그새 초췌해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를 홀렸던 미색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모양인지 메마른 입술에 절로 혀를 가져가게 만들었다. 한참을 빨다 놓아주자 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피로 범벅된 퉁퉁 부은 한 쪽 뺨에 새로 자리한 상처가 희미해진 흉터를 가렸다. 반대편을 쓰다듬으며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던 왕은 짐짓 다정한 척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그놈에게 당한 것이라 하면 내 너그러이 용서해 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한사코 거부하는 그자에게 달려들었,
윤이 단호히 내뱉은 말은 거칠게 뺨을 후려치는 손길에 끝을 맺지 못했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금 벌어져 벌건 속살을 드러내어도 왕의 손찌검엔 자비가 없었다. 수차례 가해진 충격에 고개를 축 늘어뜨린 윤이 귀를 자극하는 발소리에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리자 기다란 채찍을 말아 쥔 자가 성큼 다가왔다. 놀란 눈동자가 채 커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고통이 몸을 할퀴었다. 입술을 깨물며 버텨내던 윤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채찍질에 억눌린 신음을 간간이 내었다. 옷이 찢기고 살이 터져 피가 튀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왕은 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혼절한 후에야 멈추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물을 두어 차례 맞고 겨우 정신이 들어 꿈틀대는 윤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린 왕이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다시 묻겠다. 그놈이 너를 억지로 취했느냐?
-계절이 바뀌는지도 몰랐는데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더이다.
왕은 표정이 한결 밝아진 듯한 윤을 품에 안고 달콤한 체향을 깊이 들이마시다 그대로 잠을 청했다. 후원에서 오수를 즐긴 덕에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데룩데룩 굴리며 귓가에 퍼지는 왕의 숨소리를 듣던 윤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따뜻한 햇살에 눈을 뜨니 이미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평소와 달리 몸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았지만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방문 쪽을 돌아보는 순간 하루 가까이 잊고 있던 무사가 떠올라 금세 마음이 무거워졌다.
후원 안으로 발을 옮기던 윤은 그대로 멈추어 선 채 한참을 망설이다 비장한 표정으로 입구에 선 이를 손짓해 불렀다. 어제와 다름없이 이리저리 둘러보는 윤의 뒤를 무사가 소리 없이 따른다. 눈은 앞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온 신경이 뒤에 쏠렸다. 옅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 주위에 가득한 화초들도 어제보다 더 진한 향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말 한마디 없는 둘만의 산책을 즐기기를 수차례. 새소리만 들리던 후원 안에 언제부턴가 윤의 목소리도 울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푸르구나, 꽃이 향기롭다, 따위의 굳이 답을 요하지 않는 독백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무사도 가끔은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가까이 와보게.
풀밭에 누워 따스한 햇살을 음미하던 윤이 두어 걸음 떨어져 있는 이에게 말을 건넸다. 옆에 단정히 무릎 꿇은 무사의 길쭉한 목에 제가 만든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한참을 빤히 바라보는 저 때문에 눈 둘 곳을 몰라 하던 그가 약간 붉어진 듯한 얼굴을 살며시 돌렸다. 손을 들어 살짝 매만지자 뻣뻣하게 굳은 목이 금세 새빨갛게 물이 든다. 푸스스 웃은 윤은 목에 닿았던 손을 눈앞에 내밀었다.
-일으켜주게.
그의 목에 닿았던 손끝이, 내밀어진 팔을 잡았던 손바닥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처소로 돌아온 후에도 윤은 한참이나 제 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미지근한 저와 달리 잠깐 닿았던 그의 체온은 높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뜨겁진 않을 테다. 손을 볼에 대었다. 열기가 어느새 위로도 옮겨간 모양인지 뜨겁긴커녕 따뜻하단 느낌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둘의 거리는 날이 갈수록 가까워졌다. 감히 그럴 수 없다 만류하던 그도 더 이상은 마음을 숨기기 힘든 모양이었다. 함께 연못에 손을 담그기도 하고,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마주 앉아 한없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날도 있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리 웃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아 어색하기도 했지만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늘 입끝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냉정한 윤도 무뚝뚝한 그도 후원 안에서만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옆에 누워 흉터가 옅게 남은 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곤 깊숙한 소매를 뒤졌다. 그러더니 의아한 표정을 한 윤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제가 가진 것들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모양의 동곳을 본 윤의 눈이 깜빡이는 걸 잊은 듯 한참 동안 멍하게 뜨여 있었다.
-보잘것없지만 제 마음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단호했다. 왕이 아무리 진귀한 것들을 하사해도 본체만체했던 윤이 그 소박한 선물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촉촉한 눈을 들어 올려 강렬한 눈빛을 응시하던 윤은 입술을 그의 입에 스치듯 맞대고 놀라 굳어 있는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보잘것없지만 내 마음이네.
-그리 좋더냐? 내 그 후원에 상이라도 내려야겠구나.
나날이 밝아지는 제 안색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왕을 볼 때마다 윤은 가슴 한 편이 무거워졌다. 불편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예전과 달리 사근사근하게 굴자 바뀐 태도가 마음에 든 왕은 회임 후에 풀어주겠다던 족쇄를 직접 끊어주었다. 속내를 들키기라도 할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껏 숨 쉬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은 후원에서 그와 함께 할 때뿐이었다.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힘겹게 왕의 욕정을 받아내는 동안에도 눈을 감고 그를 떠올리면 버틸만하였다.
-그 요망한 것이 요즘에는 얌전히 군다지.
-전하께옵서 크게 기꺼워하시고는 족쇄까지 풀어주시었다 하옵니다.
-이러다 덜컥 회임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지밀상궁이 전하는 빈의 소식에 중전은 날이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졌다. 왕의 총애를 한사코 거부하여 몸 성할 날 없던 놈이 족쇄까지 차 짐승 같은 신세가 된 것에 안심했던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음을 돌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봄바람처럼 살랑거린다 하였다. 다행히 아직은 기미가 없으나 왕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는 그 천하디 천한 몸에서 원자라도 생산되는 날엔 제 처지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전히 간택된 합방 일마다 왕이 교태전에 들기는 하였지만 회임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원자가 세자가 될 것이 자명하니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여 오만방자한 빈 따위의 눈치나 보며 남은 생을 이어가야 할 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 고개를 내저은 중전은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지밀상궁의 귀에 힘주어 속삭였다.
말캉한 입술을 혀로 할짝거리던 이가 저고리 안으로 슬쩍 손을 넣었다. 흠칫하는 가슴을 살살 쓸어내리나 싶더니 금세 힘을 주어 주무르기 시작한다. 윤은 입꼬리를 양옆으로 당긴 채 달콤한 숨을 내뿜었다. 겹겹이 걸친 옷을 하나씩 풀어헤친 그가 하얗게 드러난 속살 여기저기에 입을 갖다 댄다. 간지러워 작게 소리 내어 웃던 윤이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 소리에 호흡을 멈추었다. 제 위로 쓰러진 그의 옆구리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밀어내려 힘을 주었지만 단단하게 버티고 드는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에 입술을 부딪친 윤이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고는 순식간의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무사의 앞을 막아선 윤에게 활을 겨눈 왕이 태연히 물었다.
-어허, 윤아. 짐에게 검을 들이댈 셈이냐?
-마마, 위험합니다.
안타깝게 외치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윤은 왕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의복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몸을 향해 화살은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세번째 활시위를 당기다 말고 왕은 줄지어 선 병사들을 손짓해 불렀다. 비장한 표정으로 이를 악무는 윤의 얼굴이 지척인 듯 또렷이 보였다. 왕이 옆으로 물러나자 십여 개의 화살이 줄지어 쏟아졌다. 힘겹게 쳐내던 윤의 뺨이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화살에 긁혀 주르륵 피를 흘려내었다.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가 앞으로 뛰어나와 바닥에 엎드려 사정했다.
-전하, 모두 소인의 잘못이니 제발 저의 목만 거두어 주시옵소서. 제가 강제로 마마를 능욕한 것입니다.
-내 너를 철석같이 믿고 빈을 맡겼건만, 이리 뒤통수를 치다니.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불만이 없겠구나.
무심한 말투와 다르게 성큼성큼 다가와 당장이라도 쏠 태세로 활을 겨눈 왕의 앞에 무릎 꿇은 윤이 용포 자락에 매달렸다.
-아닙니다, 전하. 소인이 싫다는 이를 억지로 붙들어 입을 맞추고 스스로 옷을 벗은 것입니다. 제발 저를 벌하소서. 저자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다...?
간절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윤에게 한참 동안 시선을 주었던 왕이 몸을 굽혀 상처 난 뺨을 천천히 쓸었다.
-죄 없는 자가 억울하게 벌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이지. 걱정 말거라 윤아, 내 저놈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으마. 짐을 위해 여러 번 목숨을 바쳤던 이다. 그런 자가 배신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살짝 입 맞춰준 왕이 안심하라는 듯 작은 뺨을 톡톡 두들기기 시작했다. 점점 가해지는 힘에 흔들리던 윤은 수차례 이어진 거센 타격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몸을 뉘었다. 손에 질척하게 묻어난 피를 쓰러진 윤의 맨 가슴에 문지르던 왕이 뭐라 뭐라 외치는 무사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명을 내리고는 후원을 나섰다.
-저놈은 의원에게 보이고 빈은 옥에 가두라.
윤이 아랫것들을 모두 물린 채 후원에 늘 홀로 들고 무사만이 그 안을 지키고 있다 하였어도 왕은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 마음속에 제가 없어도 정을 주고 살을 섞다 회임을 하고 나면 결국 윤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그 시기가 앞당겨지기라도 한 것인지 언제나 날을 세웠던 윤의 한결 누그러진 태도에 왕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침 타국에서 들여온 귀한 화초도 전할 겸 몰래 놀래주려 후원을 찾았더니 입구에 있어야 할 무사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스쳐가는 섬뜩한 기운에 급히 병사들을 대동하고 안으로 발을 옮기자 저 멀리 풀밭에서 검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심복 중에서도 가장 믿을만한 이라 여겨 붙여주었건만 그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인영은 분명 윤이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은밀히 소식을 전해 들은 중전은 급히 대전으로 향했다. 결국 그 천한 놈이 피를 숨기지 못하고 무사 따위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단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숨긴 중전은 거친 호흡을 고른 후 제 등장을 알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분노에 휩싸여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태연히 상소를 훑어보는 왕의 모습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전하, 후궁의 부정이라니요.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숲에서 빈에게 쏘았던 화살, 사실은 짐을 노린 것 아니었소?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제가 어찌 전하를...
-내 설마설마했건만 역시 그대가 맞았구려. 허울뿐인 중전 자리라도 지키고 싶으면 빈의 일 함구하는 게 좋을 거요. 짐은 정사가 밀려 바쁘니 그만 물러가시오.
중전은 휘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대전을 채 나오기도 전에 쓰러졌다. 빈을 쳐내긴커녕 자백한 꼴이 되었으니 이제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매한가지였다. 역모로 몰아 가문을 몰살해도 모자랄 지경이건만 그저 입만 닫으라는 걸 보면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절대 빈을 내칠 생각이 없단 뜻이었다. 신중하지 못했던 제 행동을 이제 와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분노와 자책이 뒤섞인 눈물이 볼을 뜨겁게 적셨다.
왕은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옥사로 발을 옮겼다. 갇혀 있던 윤을 끌어내어 매달라 명하고는 제대로 먹고 자지 못해 그새 초췌해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를 홀렸던 미색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모양인지 메마른 입술에 절로 혀를 가져가게 만들었다. 한참을 빨다 놓아주자 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피로 범벅된 퉁퉁 부은 한 쪽 뺨에 새로 자리한 상처가 희미해진 흉터를 가렸다. 반대편을 쓰다듬으며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던 왕은 짐짓 다정한 척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그놈에게 당한 것이라 하면 내 너그러이 용서해 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한사코 거부하는 그자에게 달려들었,
윤이 단호히 내뱉은 말은 거칠게 뺨을 후려치는 손길에 끝을 맺지 못했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금 벌어져 벌건 속살을 드러내어도 왕의 손찌검엔 자비가 없었다. 수차례 가해진 충격에 고개를 축 늘어뜨린 윤이 귀를 자극하는 발소리에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리자 기다란 채찍을 말아 쥔 자가 성큼 다가왔다. 놀란 눈동자가 채 커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고통이 몸을 할퀴었다. 입술을 깨물며 버텨내던 윤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채찍질에 억눌린 신음을 간간이 내었다. 옷이 찢기고 살이 터져 피가 튀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왕은 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혼절한 후에야 멈추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물을 두어 차례 맞고 겨우 정신이 들어 꿈틀대는 윤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린 왕이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다시 묻겠다. 그놈이 너를 억지로 취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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