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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치조윤 150928-08

dbsldbsl 2015. 10. 28.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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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서인은 아비가 보는 앞에서 제 목을 슬쩍 그었다. 절로 새어 나온 옅은 신음에 기겁한 조대감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입만 뻐끔거리다 한참만에 더듬더듬 소리를 토해냈다. -서, 서인아 네 어찌, 서인은 제게 다가오려는 아비의 말을 끊고 눈을 맞추며 검을 고쳐잡았다.

-누구든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저는 더 이상 산목숨이 아닐 겁니다. 어서 말에 오르세요, 형님.
-이, 이런 불효막심한 놈.
-되...었다.

부들부들 떠는 조대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윤을 재촉하던 서인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말의 엉덩이를 세게 후려쳐 출발시켰다. 숨쉬기조차 버거운 몸이 말고삐를 붙들고 과연 얼마나 멀리 피할 수 있을 것인지, 금세 정신을 잃고 낙마하는 것은 아닐는지 당장이라도 그 뒤를 따르고 싶었으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니.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서인은 애꿎은 입술만 씹었다.

야심한 시각에 저자를 달릴 수는 없는데다 뒤를 따를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도 익숙한 산길을 택해야만 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을 아무리 닦아내어도 시야는 자꾸만 흐려졌다. 젖어 있던 아래가 질척해지는 느낌과 코를 자극하는 피비린내에 두려움은 배가되었다. 달빛조차 미미한 밤에 해산한지 채 몇 시진도 되지 않은 몸이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대군, 아무래도 제 명줄은 이게 다인가 봅니다. 제 아비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자랄 우리 아이... 아이는... 살았으니 다행이겠지요. 윤은 입술을 끌어올리려 애쓰며 그리운 얼굴을 떠올렸다. 말고삐를 놓친 기력 없는 육신이 아래로 굴렀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

뻑뻑한 눈을 비비던 도치는 아궁이에 장작을 던져 넣다 익숙한 쿵, 소리에 혀를 찼다. 어휴, 저 골칫덩이가 그새를 못 참고... 문턱에 걸려 넘어져 울고 있을 다 큰 사내의 모습이 눈에 선해 서둘러 부엌을 나서자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새벽부터 또 어딜 갈라고? 굳은 얼굴로 뱉어낸 엄한 목소리에 저를 올려다보던 두 눈이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을 떨구었다. 가까이 다가가 두 팔을 내밀었지만 사내는 여느 때처럼 답삭 안겨오기는커녕 마루에 주저앉은 채 고개만 돌려 시선을 피했다. 긴 한숨을 내쉰 도치는 미약한 힘이 제 가슴팍을 밀어내는 걸 무시하고 말라빠진 몸을 어렵지 않게 안아들어 방안으로 옮겼다.

어질러진 이불 위에 내려놓고 바지를 걷어 올리자 가시지 않은 멍 위로 벌겋게 쓸린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게 왜 가만있덜 못허고! 안타까운 제 마음을 퉁명스레 표현해봐야 알아들을 리가 없는 이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표정을 바꾸고 축축이 젖은 볼을 쓱 문질러 닦아준 도치는 아직도 불퉁하게 입을 내밀고 있는 사내를 조심스레 밀어 눕혔다. 더 자, 아직 어둡잖어. 크게 뜨인 눈꺼풀 위를 덮은 손바닥에 간질간질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몇 번 꿈틀대던 사내는 금세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다.

도치가 어린애와 다름없는 사내, 윤과 만난 지도 어느덧 반년 가까이 되었다. 그날 게으름이라도 부렸다면, 평소보다 이른 일과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손가락에 휘감기는 머리카락의 부드러움도 홀쭉한 뺨의 매끄러움도 느껴볼 수 없었을 것이다. 메마른 입술을 살짝 쓸어보던 도치는 작게 뒤척이는 몸을 조심스레 토닥이다 이불을 끌어올려 꼼꼼히 덮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돌아가는 고개를 애써 바로하고 방을 나서자 환한 빛이 저를 반겼다. 윤이 깨기 전에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다 밥을 지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지게를 메고 익숙한 산길을 걷던 도치는 툭툭 불거진 꽃망울에 시선을 뺏겼다. 새초롬한 붉은빛이 자꾸만 집에 두고 온 이를 떠오르게 했다. 처음 발견했던 날 그의 옷자락은 이보다 몇 배는 더 붉었다. 생채기 가득한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

뒤숭숭한 꿈자리 탓에 일찍 잠이 깨었다. 양반 놈의 씨를 배고서도 억울하게 맞아 죽은 누이가 오랜만에 저를 찾아왔다. 근심 가득했던 얼굴이 머릿속을 채워 집을 나서기가 꺼려졌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게 더한 시련이 뭐가 있으려나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 힘차게 산을 올랐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익숙한 장소에 다다를 때쯤 뿌연 새벽빛 사이로 생소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빨간 것이 얼핏 꽃이 핀 것 같기도 했으나 하룻밤만에, 그것도 이렇게 쌀쌀한 날에 저리 풍성하게 자라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꽃은 이미 다 졌을 텐디... 아, 사람 아니여! 순식간에 뛰어온 곳에는 사내인지 계집인지 모를 이가 죽은 듯 누워있었다. 옷차림을 봐서는 아무래도 사내인 것 같아 조심스레 가슴에 귀를 갖다 대자 다행히도 미약한 울림이 느껴졌다. 숨이 붙어있긴 했으나 붉게 물든 옷자락이 심상치 않았다. 메고 있던 지게를 내려둔 도치는 기다란 몸을 둘러업고 산을 내려왔다. 제 등에 축 늘어진 이에게서 냉기만 느껴지는 듯해 마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뛰면서도 더 속도를 내지 못하는 저를 계속 탓하던 도치는 그제야 누이가 왜 꿈에 나타났는지 알 것 같았다. 이자를 살리라고, 가련하게 죽은 저 대신 이자를 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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