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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조윤 1500-01

dbsldbsl 2015. 6. 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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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하하하 연빈, 이리 서둘러 입궁을 하다니. 짐이 그리도 그리웠느냐?
-이러실 순 없습니다, 어찌 제게... 후궁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거사에 성공하고 공신 책봉만 기다리던 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정 1품 빈에 봉하니 속히 입궁하라는 어명이었다. 이는 분명 착오가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업적을 만들어낸 최고의 무관에게 후궁이 되라니. 어엿한 사내로, 무사로 저를 인정했던 대군이 이럴 수는 없다. 윤은 왕이 친히 내린 가마를 발로 걷어차고 그 길로 말을 달려 편전에 들었다. 무엄하게도 두 눈을 부릅뜨고 따지는 윤을 이미 예상이라도 했던 모양인지 왕은 놀란 기색도 없이 기함할만한 말을 내뱉었다.

-이놈 윤아, 중전이 아니라 서운하기라도 한 것이냐? 내 너를 아무리 어여삐 여긴다 해도 조강지처를 내칠 수야 없지 않으냐? 너는 그저 중전이 생산하지 못한 원자를 내게 안겨주는 것에만 힘을 쓰면 될 것이야.

결국 수양도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운명. 저와 같은 몸을 갖고 태어난 이들처럼 살고 싶지 않아 그리도 애를 썼건만. 왕좌를 차지한 수양이 이제 무사로서의 저는 필요 없으니 얌전히 궁에 들어앉아 씨나 받으란다. 분노로 떨리는 몸을 그대로 내보이며 윤은 이를 악물고 왕의 발치 아래 무릎을 꿇었다.

-소인은 전하를 신하로서 모시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친히 윤의 앞까지 걸어내려온 왕이 매끄러운 볼을 쓸었다. 아무리 저라도 어수를 차마 뿌리치진 못한다. 움찔거리는 곧은 눈썹만이 제 주인의 심정을 드러내었다. 왕은 작은 턱을 잡아 쥐고 으스러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힘을 주었다. 절로 나오는 신음을 참아내는 윤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왕은 싱글거리는 용안을 가까이 들이밀고 벌겋게 달아오른 귀에 속삭였다.

-어명을 거역하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삼족을 멸할 것이다. 한낱 서자 때문에 풍양 조가는 씨가 마르게 되는 것이지. 너를 괄시한 아비에게 복수하는 것으로는 참 괜찮은 방법인 것 같구나. 물론 내 너에게만은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주마. 폐궁에 갇혀 사지가 묶인 채 짐을 즐겁게 해주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니라. 자, 어찌하겠느냐? 명을 받들겠느냐, 어기겠느냐?

-...소인, 절대로 전하께, 마음 한자락,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마디마디 힘주어 뱉는 건방진 윤의 언사에도 왕은 불쾌한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절 은애하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그동안 홀로 쌓아 올린 연심이 넘쳐 흘러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발끝으로 새어 나온 물줄기는 윤의 육신을 휘감아 올라 가슴까지 들어찰 게다. 늪에 빠진 양 허우적대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러니 손에 쥐인 가련한 꽃의 투정쯤은 한 귀로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손자국이 남은 턱과 노엽게 떨리는 눈가가 한없이 고왔다. 이 아름다운 존재가 온전한 제 소유인 것이다. 더는 욕망을 숨길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왕은 앙다물어진 얇은 입술에 달려들었다. 부딪치는 순간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달았다. 말캉한 혀와 보드라운 속살이 그 어떤 여인보다 더했다. 잠깐의 접문만으로도 고간에 힘이 들어갔다. 작은 얼굴 전체를 삼킬 듯이 빨아대던 왕은 견디다 못한 윤이 저도 모르게 밀어내는 힘을 인지하고서야 겨우 입을 떼고 물러났다.

바닥에 엎어진 등이 바쁘게 들썩인다. 왕은 거친 숨소리를 흥겨운 가락이나 되는 듯 즐거이 듣다 윤이 그 나이가 되도록 누구와도 정을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물론 후궁이 될 이라면 몸가짐을 조신히 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지만 윤은 그네들과 같은 처지가 아니었지 않나. 그럼에도 이리 가벼운 접촉뿐 아니라 앞으로 행해질 모든 것이 윤에겐 처음인 게다. 오직 이 수양, 아니 지존만이 꺾을 수 있는 꽃. 하하하. 편전 안을 울리는 가가대소에 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 딴에는 사납게 치뜬 눈매가 촉촉이 젖어든 것이 배로 부푼 입술과 어우러져 꽤나 볼만했다. 아니, 절경이라 하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꿇어앉아있는 윤을 지나치며 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빈을 처소로 안내하라.



연빈에 연화당이라? 대체 저의 어디가 연꽃 같다는 말인가? 서안이 부서져라 내리친 윤은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붙들린 턱과 빨린 입술이 아직도 욱신거렸으나 마음의 상처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처럼 운명에 순응했다면 어미를 따라 기생이 되었거나 별 볼 일 없는 양반의 첩 노릇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이 싫어 누구보다 노력한 끝에 이른 나이에 월등한 실력으로 무과 급제까지 해내었다. 물론 수양의 비호가 없었다면 제 신세는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눈에 들기 직전 이미 험한 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그런 수양이 제게 아무리 은인 같은 존재라 하여도 이건 아니었다. 분명 저를 다른 이들처럼 보지 않을 거라,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할 것이라 약조했었는데...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알아차리지 못한 제가 아둔하였다. 이제 그토록 원하던 자리를 꿰찼으니 검은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진심으로 믿고 따랐던 이도 결국 원하는 건 이 끔찍한 몸뚱이였을 뿐이었구나. 억지로 밀어 넣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마, 중전마마께 문안을 올리셔야 하옵니다.

기진하여 잠이 든 윤은 상궁의 거듭된 채근에 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대군 사저에서도 늘 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중전에게 이제는 같은 지아비를 섬기게 되었으니 잘 봐달라 인사를 해야 한다? 현숙한 부인인 척 하나 부부인일 적에도 이미 수양에게 저에 대한 비방을 은근히 늘어놓았던 걸 윤은 모르지 않았다. 후궁 신세가 된 것만 해도 통탄할 노릇인데 중전의 얼굴을 마주한 채 한껏 머리 숙여 굽실거릴 생각을 하니 온몸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앓아누웠다고 여쭈어라.

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궁을 모른척하고 이불을 머리 끌까지 올려 덮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핑계는 사실로 변했다. 고열에 시달리는 윤을 위해 왕이 친히 어의까지 보내주었지만 몸이 아닌 마음이 상한 것이라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도 차도가 없다는 보고를 듣던 왕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성정에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테지. 저를 보면 혹시나 더 악화될까 싶어 얼굴 한 번 비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보필하라는 명만 내린 채 그저 윤의 심신이 진정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며칠을 앓던 윤이 겨우 일어나 앉을 때쯤 중전이 처소에 들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였나 보구나. 아니면 어찌 알고 이리 때를 맞추어 나타난단 말인가. 상석을 내주고 절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 새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 윤을 한참 동안 노려보기만 하던 중전이 입을 떼었다.

-빈이 나를 찾지 않아 내 직접 걸음을 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문안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중전마마께서도 소인의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실 터이니 부부인 시절처럼 전하께 저에 대해 고해 주시지요. 마마의 뜻을 예전처럼 무시할 순 없을 것이 아닙니까. 제발 불민한 저를 변방으로 내쳐달라 청을 드려 주옵소서. 소인은 그저 무관으로 남고 싶었을 뿐 이 자리를 결코 원한적이 없나이다. 궁에 틀어박혀 종마 노릇이나 하려고 그리 애쓰며 살아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원자의 어미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으니 마마께서 낳으소서.

열이 오른 머리는 되는대로 입을 놀리라 명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저를 고깝게 보는 중전이면 청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던 건 물론이다. 꽤나 심하게 앓았다 하여 그 기가 눌린 줄 알았건만 그렇지도 않은 것인지 악을 쓰듯 한참을 지껄이다 제풀에 지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윤에 경악한 중전이 겨우 입을 열었다.

-어찌 이리 방자한가? 천한 신분은 속일 수가 없구나.

왕이 저 요망한 미색에 홀려 원자를 낳아달라고까지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십 년 넘게 회임을 하지 못하였다 하나 조강지처인 저를 이리 박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 저 천한 놈에게서 원자를 얻게 두지 않으리라. 노여움에 입술을 덜덜 떨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중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윤은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가슴에 품고 있던 말을 내뱉었지만 후련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왕은 연화당에서의 일을 전해 들으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중전이 기함했겠구나. 과인을 찾아오지 않는 것만도 용타.

이제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여도 물러나지 않고 머뭇대는 내관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더 고할 것이 남았더냐?

이해 못할 것은 아니나 참으로 괘씸했다. 중전이 사라진 후 잠잠하던 윤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와 보초들과 실랑이를 하였단다. 물론 맞서 싸울 수 없는 처지인 그이들은 윤이 뺏어든 검에 중상을 입었고. 아무리 저라도 목을 걸고 주위를 둘러싼 상궁나인들까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인지 이를 악물고 비켜서라 으르렁대더니, 기세 좋게 움직여댄 것이 무색하게도 처소 안에 곱게 누운 신세가 되어버렸다 했다. 앓느라 축난 몸이 쓰러지는 통에 멈춘 것이 윤에게는 다행일 테다. 일을 더 크게 벌였다가 제게 팔이라도 잘렸을지 모를 일이니.





왕은 어스름이 깔릴 무렵, 윤을 찾았다.

-주사앙...

제 등장을 알리려는 내관에게 입을 다물라 손짓한 뒤 조용히 열린 방문 안으로 들어서자 병풍 쪽을 보고 누운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성큼성큼 걸어가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어내려던 왕은 손목에 닿아오는 뜨끈한 감각에 슬쩍 힘을 풀었다. 허리를 숙여 마주한 얼굴에 열기가 그득하다.

-궁을 빠져나가 보지 그랬느냐. 왜 갑자기 겁이라도 났던가, 아비의 목이 저자에 걸릴 것이. 너그럽게 보아주려 했으나 과인이 직접 내린 무사를 다섯이나 벤 걸 묵과할 순 없구나.

왕은 윤을 밀어 눕힌 채 그 위에 올라타 뺨을 내리쳤다. 철썩이는 소리에 제 귀까지 따가울 지경이건만 체념한 표정으로 두 눈을 꾸욱 감고 신음하나 내지 않는 게 얄밉다. 사정이라도 하면 못 이기는 척 매질을 거둘 터인데, 바싹 마른 입술이 피를 흘려내어도 꼼짝 하질 않는다. 미련할 만큼 고집스럽다. 소리 없이 혀를 차던 왕은 얼얼해진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긴 눈꼬리 아래로 물길이 났다. 퉁퉁 부어오른 양 볼이 잘 여문 홍옥만큼 새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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