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성조윤 170104
1학년 태성이 입학하자마자 2학년 윤이한테 첫눈에 반해라. 하루에도 몇 번씩 갖다 바치는 음료수(그것도 저는 손하나 까딱 안 하고 웬 찌질한 놈 시켜서)라든가 누나 예뻐요♥, 라 써갈긴 것도 모자라 입술도장까지 찍어보낸 쪽지라든가. 친구도 필요 없어서 안 사귀는데 양아치 1학년 따위 상대해줄 마음이 있을 리가 없는 윤이. 받기 싫으니 가져가라는 말도, 불쾌한 표정으로 찢어버리거나 하는 일도 없이 아예 아무 반응도 없어라. 일어난 자리에 음료수캔 홀로 외로이 놓여있다거나 예쁘게 접힌 쪽지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날아가 교실 바닥 뒹굴거나 그러겠지. 멀리서 그거 바라보던 태성이 제 심장 부여잡고 슬픈 표정 짓지만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겠지. 어차피 제 거 될 텐데 튕기는 게 귀엽다 생각하면서.
누나! 좋아해! 나랑 사귀자! 전교생 다 모인 강당에서 울려 퍼진 외침에 애들이고 선생이고 웅성대겠지. 남학교에서 누나라니, 몇몇은 자연스레 여자선생 쪽으로 눈 돌리지만 윤이네 학년 애들은 윤이쪽 바라봐라. 윤이가 제일 예쁘니까. 누나 소리 들을만한 게 윤이 밖에 없으니까. 제게 쏟아지는 시선 눈치도 못 챈 윤이 아까 외우던 영어단어나 되새기고 있는데 꽃다발 든 태성이가 2층에서 뛰어내리겠지. 가뿐하게 착지하고 윤이쪽으로 당당하게 걸어오면 겨우 정신 차린 선생들 저놈이구나 하고 태성이 잡으러 뛰겠지. 태성이 얼른 방향틀려다 옆에 있는 애한테 꽃 한 송이 뽑아서 윤이누나 줘, 속삭이고 도망가라. 윤이 그 꽃 손에 쥐고서야 제가 그 누나였다는 거 알게 되겠지. 얼굴 벌겋게 달아올라선 꽃 패대기치고 자근자근 짓밟다가 그거 본 담임한테 불려가 해명까지 하게 되는데, 금세 이성 되찾고 저는 모르는 놈이다, 아무 상관없다는 냉정한 말에 미심쩍은 표정이지만 담임 고개 끄덕이겠지.
내버려 둔 게 문제였나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할걸 그랬나 그날 내내 고민하던 윤이, 누나! 여기여기! 교문 나서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손 붕붕 흔드는 태성이 보게 되겠지. 바이크 끌고 기다려! 외치고는 순식간에 윤이 앞에 슝~ 윤이 환하게 웃는 태성이 빤히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만해, 니 장난 받아줄 여유 없, 하다가 헬멧 쓰게 되겠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어, 학주다! 하고 잡아끄는 태성이 뒷자리에 엉덩이 걸치자마자 출발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어느새 태성이 허리 꽈악 감고 있어라. 등에 찰싹 달라붙어선 헬멧 쓴 채로 미쳤냐고 빨리 내려달라는 꽥꽥 소리 질러대는 윤이 매달고 태성이 씨익 웃으며 그대로 윤이 집 근처까지 달리겠지. 윤이 바이크에서 내리자마자 헬멧 벗어던지고 태성이 뺨부터 있는 힘껏 때려라. 한대로는 부족해서 또 손 들어 올렸다가 심장쪽 움켜쥐는 태성이 때문에 그대로 굳으면 좋겠다. 머리로는 또 무슨 수작인가 싶은데 몸이 안 움직이겠지. 바이크 위에 반쯤 엎드린 채로 일어나질 않으니까 윤이 슬슬 불안해지겠지. 야, 너... 결국 다가서서 어깨 잡아 돌리는데 그새 창백해진 안색에 괜찮아? 소리가 절로 나오겠네. 식은땀까지 맺힌 채 벌겋게 부어오른 뺨으로 희미하게 웃는 게 꽤나 아파 보여서 윤이 더는 뭐라 못하겠지. 윤이 괜찮다는 태성이한테 등 떠밀려 집으로 들어가면서도 뒤돌아보고 싶은 거 참느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면 좋겠다.
다음날부터 너무도 멀쩡한 태성이 본격적으로 들이대는데 윤이 무시하지도 냉정하게 쳐내지도 못하면 좋겠다. 죽은 서인이 생각나서. 제 손으로 그 숨을 막은 건 순간이었고 어려서 몰랐다지만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일찍 세상을 뜬 건데 저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씻을 수가 없는 거. 태성이는 이미 오래전에 수술 성공해서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은데 윤이한텐 비밀. 어쨌든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 이라는 말에만 표독하게 쏘아봤을 뿐, 윤이가 밀어내질 않으니까 대답이래 봐야 대부분 아니, 임에도 조금씩 가까워지겠지.
2학기도 반이 지날 때쯤 돼서는 태성이 바이크 끌고 등교하는 윤이 옆에 딱 붙어선 아가씨 탈래? 같은 소리나 하면서 엉덩이 꽈악 쥐었다가 윤이 야! 빼액 소리 지르고 뛰기 시작하면 누나! 나 먼저 간다! 외치고 쌩 가버리고 그러는 사이까지 돼있어라. 사귀자는 말은 다시 한 적이 없는데 누나 소리는 아무리 지랄해도 계속해라. 윤이 정색하고 말해봤자 그럼 오빠라고 불러줘, 같은 말이나 들었겠지. 맨날 하나가 장난치면 다른 하나가 파르르하는 게 다라 선생이나 애들이나 예전에 태성이가 요란하게 고백했던 거 잊고 그냥 구경이나 할 뿐 둘 관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 이제 하나도 없겠지.
누나 소리에 치를 떨던 윤이 하루는 태성이 앉혀놓고 진지하게 말 꺼내는데 평소처럼 애교 떨다 장난이나 쳐야 할 태성이도 진지하게 받는 거. 심장 얘기부터 누나 얘기까지. 형을 보면 누나가 떠올라. 많이 닮았어. 근데 이제는 같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러면서 자연스레 하늘 올려다보니 윤이는 또 서인이 생각이 나서 아무 말도 못하겠지. 윤이가 허락해준 거나 마찬가지니 태성이는 더 신나게 누나누나 불러대고 윤이 하지 말라고는 차마 못하고 사람 많은 데서는 좀! 타박하는 게 다여라. 나중에 누나랑 있는 태성이 우연히 만나는데 저와 닮은 구석 하나도 없는 데다가(태성이는 귀여운 게 똑같다고 함) 멀쩡히 살아있는 걸로도 모자라 지나치게 건강해 보여서 윤이 배신감에 치를 떨면 좋겠다. 너 그때! 내가 뭘? 누나랑 떨어져 산지 1년도 넘었단 말이야, 라면서 징징대는 태성이 때리지도 못하고 눈이 째져라 노려보기만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