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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치조윤 161225

dbsldbsl 2016. 12. 2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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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낸디 이 꽃같이 곱다 허면 질색할랑가? 한 손 가득 담긴 꽃잎들이 떨어질세라 도치는 얼른 다른 손을 받쳤다. 윤과 닮은, 어울리는 색으로만 골라 딴 것들이다. 하얀 것은 겹겹의 옷자락으로 감추어둔 보드라운 속살 같고, 붉은 것은 달뜬 숨 사이사이 달달한 신음을 흘려내는 촉촉이 젖은 입술 같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금세 머릿속을 채우는 건 밤의 윤이다. 요 며칠 풀어내지 못한 욕정이 꿈틀대는 걸 애써 누르며 도치는 서둘러 걸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윤에게 이렇게라도 봄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운 거 좋아하고 고운 게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고운 양반이니 내다 버리라고는 하지 않을 거다.

언제부턴가 무엇이든 고운 것을 보면 자연스레 윤이 떠올랐다. 스무해 남짓 살아오면서 그만큼 고운 이는 보질 못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산채의 계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쇠고기를 나르던 때 얼핏 훔쳐본 양반댁 규수들, 저자를 활보하는 기생들을 갖다 대어도 아니 되었다. 나라님의 후궁쯤은 되어야 엇비슷하려나 싶었다. 이년 넘게 지척에서 보아왔음에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밤이 셀 수 없음에도 그 요사스러운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사내, 아니 인간이 맞나 의심스러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게 밤새 시달리다 기진하여 잠든 윤이 꼬리 아홉 달린 여우는 아닌가 이불을 들추어 보기도 했고,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가슴을 더듬어 제 간이 멀쩡히 들어 있나 확인한 적도 있었다. 하는 짓을 봐선 여우는커녕, 곰 같은 여편네만도 못한 위인이었지만.

산채가 가까워질수록 잠시나마 들떴던 기분은 다시 가라앉았다. 아침상을 들여가도 대꾸 없는 등만 바라본 게 벌써 닷새가 넘었다. 겨우내 더 마른 것 같은데 도통 제 앞에선 밥 한술 뜨려 하질 않으니 또 탈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물론 윤이 그러는 건 언제나처럼 오롯이 제 탓이라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다짐도 했다. 허락할 때까지는 손하나 대지 않겠다는 지킬 자신 없는 약조까지 했건만 제가 뭐라 지껄여대건 들은 척도 안 하는 건 그래도 좀 야속했다. 뭐 따지고 보면 그짝도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못허지,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어. 그러니께 왜 굳이 가겠다 고집을 피워ㅅ, 시부럴 저 잡년이! 도치는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제 처소를 향해 날듯이 뛰었다.

어깨를 붙드는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안으로 윤을 던지다시피 밀어 넣었다. 다급한 태기의 외침을 무시하며 문을 부서져라 처닫은 도치는 휘청이는 윤에게 성큼 다가가 뺨부터 후려쳤다. 약해진 몸뚱이는 단 두번의 손찌검에도 버티질 못하고 바닥에 나자빠진다. 그걸 또 달려들어 악착같이 걷어찼다. 그새를 못 참고! 기집 노릇을 하더니 진짜 기집이라도 된 것이여? 어째 사내만 보면 가만히 있덜 못허고! 악을 쓰며 발길질을 하던 도치는 제풀에 지쳐 금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달을 내고서도 변한 게 없다, 늘 저만 전전긍긍 안달복달. 애써 호흡을 고르며 진정을 하려는데 어느새 몸을 일으킨 윤이 풀린 옷고름을 다시 매고 엉망이 된 머리를 가다듬는다. 벌겋게 부어오른 손자국을 달고 있는 주제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표정이다. 도치는 그 꼴에 다시 부아가 나 우악스레 멱살을 쥐어당겼다. 또 뭔 소리를 했당가, 산을 내려가게 해달라고? 변명 한마디 없이 돌아가는 고개를 붙들어 다시 한번 다그친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어? 전에 부탁한 것을 구해다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한 것뿐이다. ...어?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주먹이 맥없이 풀렸다.

이리저리 흩어진 서책 너댓권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씨벌, 도치는 소리없이 입모양만으로 욕을 뱉었다. 또, 개같은 성질머리로 일을 그르쳤다. 도통 생각이란 걸 하지 못하는 아둔한 천것이 죄없는 윤을 상처입혔다. 그, 그려? 말을 허지. 난 또 그짝이... 변명할 틈 같은 건 주지도 않았으면서, 들어볼 생각도 없이 손부터 내지른 걸 분명 알고 있는데 제 입은 어느새 윤의 탓을 하고 있다. 눈을 질끈 감으며 도치는 방정맞은 입술을 이로 씹어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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