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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조윤 1500-02
dbsldbsl
2015. 6. 1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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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간간이 뱉어지는 뜨끈한 제 숨결을 제외하곤 사방이 고요했다. 얻어맞아 먹먹해진 귀가 기능을 못하는 건가 싶을 만큼.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화끈대는 뺨 안쪽에서 비릿한 쇠맛이 났다. 온몸을 샅샅이 훑는 시선이 날카로이 와닿는데, 감출 수 없는 이리의 기운이 이리도 생생한데, 옆에 있는 게 분명한 왕은 한참 동안 기척 하나 없었다. 그래도 윤은 굳이 눈을 열어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잠들길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침잠하는 의식을 깨운 건 허리춤을 더듬는 감각. 순식간에 스르르, 바지 고름이 풀리고,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맨 다리가 드러났다. 열로 예민해진 살갗 위론 소홈이 돋았다. 왕은 놀라 움츠러든 마른 몸을 어렵지 않게 뒤집어 양팔과 무릎을 세워 지탱하라 일렀다. 비슬비슬 힘겹게 자세를 잡은 윤이 겁먹은 얼굴로 시선을 맞춰온다.
-전하... 제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애처롭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가련했다.
-후궁의 도리는 하여야지.
냉정한 대꾸에 윤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왕은 제대로 서지도 않은 양물로 아무런 준비가 안된 입구를 두드렸다. 매끈한 등이 긴장으로 움찔거렸고, 그 아래에 깔린 금침의 구김은 좀 더 진해졌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흰 엉덩이를 억지로 잡아 벌려 두터운 살덩이를 기어코 밀어 넣자 으흑, 윤이 아픈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사내를 받을 수 있는 몸이라 하나 풀어주지도 않은 좁은 곳이 쉽게 열릴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처음이 아닌가. 순간 멈칫했던 왕은 엄한 목소리로 윤을 책망하며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찌 이리 엄살이 심해, 아직 시작도 안 했느니.
홀쭉한 옆구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어 당기는 힘에 윤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왕은 그에 아랑곳 않고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양물을 단번에 뿌리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악, 높다란 비명이 귀를 때린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윤이 잘게 떨며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왕은 틈을 주지 않고 늘어진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검을 휘두르던 기세는 어디로 간 게야. 네 겨우 이 정도에 굴복할 위인은 아니지 않으냐.
비아냥대는 말투에 한껏 휘었던 등줄기가 애써 제모습을 찾았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선혈이 윤이 느끼는 고통을 말해주는 듯해 인상이 절로 써졌으나 왕은 거침없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억지로 열린 몸이 뒤늦게 애액을 흘려보내 처음보다 출입은 쉬워졌어도 이미 상처 입은 육신은 간간이 억눌린 울음만 뱉었다.
왕은 제 씨물을 품은 윤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멍이 올라오는 뺨은 눈물로 범벅이었고 짓씹은 입술엔 피가 맺혀 있었지만 여전히, 아니 평소보다 갑절은 더 어여뻤다.
-내 꼭 이 몸에서 원자를 얻을 것이다.
달아오른 귓가에 속삭인 말에 윤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열었다.
-저, 전ㅎ...
갈라진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걸 무시하고 한 손에 쥐이는 발목을 들어 올리자 겁에 질린 눈동자가 다시 물기를 비친다.
두려움에 절로 오므라드는 허벅지를 양옆구리에 끼운 채 몇 번이고 토정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던 왕은 동이 틀 때 즈음해서야 겨우 윤을 놓아주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나 제 흔적 가득한 나신이 여간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제 것이 된 느낌이 들었다. 혼절한 듯한 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꼼짝하지 않던 왕은 작은 뒤척임에 얼른 표정을 굳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나인들이 옷시중을 드는 내내 고개 한번 돌리지 않다 방을 나서기 직전 돌아누운 등에 대고 냉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명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말라.
이미 성치 않았던 몸은 거칠게 다루어진 탓에 쉽게 낫지 않는다 하였다. 온몸을 잠식했던 분노는 윤을 취하는 밤 사이 흐릿해졌지만 앓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빈자리는 점점 커져가는 후회가 채웠다. 그래도 처음인데 너무 과했구나. 저도 답답하여 홧김에 그리 행동한 것이겠지. 원치 않던 자리에 억지로 앉혔으니 그 속이 제 속이 아닐 터인데. 좀 참고 잘 달래어 볼 것을. 제 성급함을 탓하던 왕은 틈만 나면 연화당 앞을 몰래 서성이면서도 그 눈을 마주하기가 민망하여 그대로 돌아서곤 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왕은 결국 야심한 시각에 윤이 잠든 틈을 타 도둑괭이처럼 조심스레 안으로 들었다. 지존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싶어 기가 찼으나 수일 만에 눈에 담긴 초췌한 얼굴과 갈라터진 입술에 가슴 한편이 저렸다. 이리 괴롭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과인은 그저... 긴 한숨을 내뱉고 하염없이 윤을 바라보기만 하던 왕은 한숨도 자지 못한 몸이 고단함을 호소하는데도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아 사위가 밝아오는 걸 깨닫고서야 겨우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죽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는 내관의 보고에 왕은 반색하며 급하게 윤을 찾았다. 하지만 절을 올리고 다소곳이 앉은 후궁에게 차마 눈을 두지 못하고 괜스레 서안 위에 놓인 서책만 들추는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두어 번 헛기침을 하다 태연한 척 이미 알고 있던 몸 상태에 대한 질문을 건네자 염려해주신 덕에 깨끗이 나았다는 답이 들려왔다. 손수 남겨줬던 멍 자국이 사라져 제 색을 찾은 고운 낯에 길게 드리워진 음영을 몰래 힐끔거렸지만 시선을 부딪치기가 영 껄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왕의 체면이 혀끝에서 맴도는 사과를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결국 저 때문에 곤해질까 저어되어 편히 쉬라는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연화당을 나서야 했다.
그 후로도 날마다 들러 얼굴을 비추었으나 윤은 그 잠깐을 제외하고는 하루 내내 누워서 지낸다 했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금족령을 풀어주었건만 윤은 방 밖으로 발 한 번 내딛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바람이라도 쐴 겸 말을 타러 가자 하였다. 제 애마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윤은 그 자체로 절경이었다. 햇살보다 더 눈부신 자태에 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윤과 열 명 남짓한 무사들이 따랐다. 어깨를 짓누르던 근심들을 바람에 씻어내기라도 할 양으로 한참을 달리던 왕은 저를 바싹 쫓던 윤이 앞질러 나가는 모습에 얼른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점점 벌어지는 거리에 온몸을 잠식한 불안감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빈을 잡아라!
무사 서넛이 윤을 쫓았으나 좀처럼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를 갈며 활을 뽑아들려던 왕은 눈을 의심하게 만든 광경에 말고삐를 움켜쥐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윤을 태운 말이 뒷다리에 박힌 화살 탓에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왕은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호위들의 위험하다는 외침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걸었다. 그리고는 낙마하다 부딪힌 어깨를 부여잡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윤에게 손에 들린 등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감히, 짐이 보는, 앞에서, 도망이라도, 하려 했더냐?
노성과 함께 쏟아지는 매질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던 몸은 언제부턴가 그저 웅크린 채로 충격을 그대로 받아내고만 있었다. 간간이 뱉어지는 신음이 아니었다면 의식을 잃었다 여겼을 것이다.
-왜 답이 없어, 내게서 달아나려 했냔 말이다.
거친 숨결이 뺨에 와 닿았다. 멱살을 틀어쥔 힘에 상체를 일으킨 윤은 맹수와 다를 바 없이 빛나는 두 눈을 마주했다. 그렇다 하면 어쩔 요량이십니까? 또 아비를 놓고 협박이라도 하실는지요. 아니면 이번엔 제 목이라도, 세차게 돌아간 고개가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몇 번 더 먹먹한 귓가를 때렸다.
-가슴이 답답하여 그랬습니다.
붉어진 눈을 부릅뜨고, 그보다 더 짙은 빛의 핏줄기를 흘려내는 입술로 저를 탓한다. 애초에 약조를 어긴 것도, 도망하고 싶게 옥죈 것도 모두 저라 소리 없이 외치는 윤에게 왕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어차피 너는 내 것이거늘. 왕은 반쯤 누워있는 윤의 멱살을 고쳐 쥐고 힘을 주어 당겼다. 기우뚱한 몸이 버티려다 말고 체념한 듯 맥없이 딸려온다.
윤을 제 말에 태운 왕은 그 뒤에 바싹 붙어 앉아 궁을 향해 달렸다. 눈앞에 보이는 기다란 목덜미에 당장이라도 이를 박아 넣고 싶다. 겹겹이 덮인 옷자락 안에 감춰진 매끈한 살결을 제 흔적으로 물들이고 싶다. 얌전히만 굴면 온 세상이 네 것이 될 터인데 어찌 이리 속을 썩여. 왕은 허리를 감아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네 마음 따위야 무엇이든 활을 쏘아서라도, 불구로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짐의 옆에 묶어둘 셈이다.
왕은 윤을 처소에 던져둔 채 수십의 병사를 세워 그 앞을 단단히 지키라 이른 뒤 대전에 들었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적이 누굴 노렸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였다. 윤을 해할 목적으로 말의 다리를 쏘았던 것인지, 왕인 저를 목적으로 접근했다 실패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경계를 더 강화하라는 명을 내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일찍 침전에 들었으나 잠이들기는커녕 눈조차 감기질 않는다. 왕은 금침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아 미간을 구긴 채 윤을 떠올렸다. 저를 두고 거침없이 달려나가던 뒷모습은 잊을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제 신변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는 것보다도 윤이 저에게서 벗어나려 했단 사실에 더 분노가 치밀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침잠하는 의식을 깨운 건 허리춤을 더듬는 감각. 순식간에 스르르, 바지 고름이 풀리고,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맨 다리가 드러났다. 열로 예민해진 살갗 위론 소홈이 돋았다. 왕은 놀라 움츠러든 마른 몸을 어렵지 않게 뒤집어 양팔과 무릎을 세워 지탱하라 일렀다. 비슬비슬 힘겹게 자세를 잡은 윤이 겁먹은 얼굴로 시선을 맞춰온다.
-전하... 제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애처롭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가련했다.
-후궁의 도리는 하여야지.
냉정한 대꾸에 윤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왕은 제대로 서지도 않은 양물로 아무런 준비가 안된 입구를 두드렸다. 매끈한 등이 긴장으로 움찔거렸고, 그 아래에 깔린 금침의 구김은 좀 더 진해졌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흰 엉덩이를 억지로 잡아 벌려 두터운 살덩이를 기어코 밀어 넣자 으흑, 윤이 아픈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사내를 받을 수 있는 몸이라 하나 풀어주지도 않은 좁은 곳이 쉽게 열릴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처음이 아닌가. 순간 멈칫했던 왕은 엄한 목소리로 윤을 책망하며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찌 이리 엄살이 심해, 아직 시작도 안 했느니.
홀쭉한 옆구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어 당기는 힘에 윤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왕은 그에 아랑곳 않고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양물을 단번에 뿌리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악, 높다란 비명이 귀를 때린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윤이 잘게 떨며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왕은 틈을 주지 않고 늘어진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검을 휘두르던 기세는 어디로 간 게야. 네 겨우 이 정도에 굴복할 위인은 아니지 않으냐.
비아냥대는 말투에 한껏 휘었던 등줄기가 애써 제모습을 찾았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선혈이 윤이 느끼는 고통을 말해주는 듯해 인상이 절로 써졌으나 왕은 거침없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억지로 열린 몸이 뒤늦게 애액을 흘려보내 처음보다 출입은 쉬워졌어도 이미 상처 입은 육신은 간간이 억눌린 울음만 뱉었다.
왕은 제 씨물을 품은 윤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멍이 올라오는 뺨은 눈물로 범벅이었고 짓씹은 입술엔 피가 맺혀 있었지만 여전히, 아니 평소보다 갑절은 더 어여뻤다.
-내 꼭 이 몸에서 원자를 얻을 것이다.
달아오른 귓가에 속삭인 말에 윤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열었다.
-저, 전ㅎ...
갈라진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걸 무시하고 한 손에 쥐이는 발목을 들어 올리자 겁에 질린 눈동자가 다시 물기를 비친다.
두려움에 절로 오므라드는 허벅지를 양옆구리에 끼운 채 몇 번이고 토정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던 왕은 동이 틀 때 즈음해서야 겨우 윤을 놓아주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나 제 흔적 가득한 나신이 여간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제 것이 된 느낌이 들었다. 혼절한 듯한 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꼼짝하지 않던 왕은 작은 뒤척임에 얼른 표정을 굳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나인들이 옷시중을 드는 내내 고개 한번 돌리지 않다 방을 나서기 직전 돌아누운 등에 대고 냉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명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말라.
이미 성치 않았던 몸은 거칠게 다루어진 탓에 쉽게 낫지 않는다 하였다. 온몸을 잠식했던 분노는 윤을 취하는 밤 사이 흐릿해졌지만 앓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빈자리는 점점 커져가는 후회가 채웠다. 그래도 처음인데 너무 과했구나. 저도 답답하여 홧김에 그리 행동한 것이겠지. 원치 않던 자리에 억지로 앉혔으니 그 속이 제 속이 아닐 터인데. 좀 참고 잘 달래어 볼 것을. 제 성급함을 탓하던 왕은 틈만 나면 연화당 앞을 몰래 서성이면서도 그 눈을 마주하기가 민망하여 그대로 돌아서곤 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왕은 결국 야심한 시각에 윤이 잠든 틈을 타 도둑괭이처럼 조심스레 안으로 들었다. 지존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싶어 기가 찼으나 수일 만에 눈에 담긴 초췌한 얼굴과 갈라터진 입술에 가슴 한편이 저렸다. 이리 괴롭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과인은 그저... 긴 한숨을 내뱉고 하염없이 윤을 바라보기만 하던 왕은 한숨도 자지 못한 몸이 고단함을 호소하는데도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아 사위가 밝아오는 걸 깨닫고서야 겨우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죽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는 내관의 보고에 왕은 반색하며 급하게 윤을 찾았다. 하지만 절을 올리고 다소곳이 앉은 후궁에게 차마 눈을 두지 못하고 괜스레 서안 위에 놓인 서책만 들추는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두어 번 헛기침을 하다 태연한 척 이미 알고 있던 몸 상태에 대한 질문을 건네자 염려해주신 덕에 깨끗이 나았다는 답이 들려왔다. 손수 남겨줬던 멍 자국이 사라져 제 색을 찾은 고운 낯에 길게 드리워진 음영을 몰래 힐끔거렸지만 시선을 부딪치기가 영 껄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왕의 체면이 혀끝에서 맴도는 사과를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결국 저 때문에 곤해질까 저어되어 편히 쉬라는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연화당을 나서야 했다.
그 후로도 날마다 들러 얼굴을 비추었으나 윤은 그 잠깐을 제외하고는 하루 내내 누워서 지낸다 했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금족령을 풀어주었건만 윤은 방 밖으로 발 한 번 내딛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바람이라도 쐴 겸 말을 타러 가자 하였다. 제 애마 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윤은 그 자체로 절경이었다. 햇살보다 더 눈부신 자태에 왕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 뒤를 윤과 열 명 남짓한 무사들이 따랐다. 어깨를 짓누르던 근심들을 바람에 씻어내기라도 할 양으로 한참을 달리던 왕은 저를 바싹 쫓던 윤이 앞질러 나가는 모습에 얼른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점점 벌어지는 거리에 온몸을 잠식한 불안감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빈을 잡아라!
무사 서넛이 윤을 쫓았으나 좀처럼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를 갈며 활을 뽑아들려던 왕은 눈을 의심하게 만든 광경에 말고삐를 움켜쥐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윤을 태운 말이 뒷다리에 박힌 화살 탓에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왕은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호위들의 위험하다는 외침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걸었다. 그리고는 낙마하다 부딪힌 어깨를 부여잡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윤에게 손에 들린 등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감히, 짐이 보는, 앞에서, 도망이라도, 하려 했더냐?
노성과 함께 쏟아지는 매질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던 몸은 언제부턴가 그저 웅크린 채로 충격을 그대로 받아내고만 있었다. 간간이 뱉어지는 신음이 아니었다면 의식을 잃었다 여겼을 것이다.
-왜 답이 없어, 내게서 달아나려 했냔 말이다.
거친 숨결이 뺨에 와 닿았다. 멱살을 틀어쥔 힘에 상체를 일으킨 윤은 맹수와 다를 바 없이 빛나는 두 눈을 마주했다. 그렇다 하면 어쩔 요량이십니까? 또 아비를 놓고 협박이라도 하실는지요. 아니면 이번엔 제 목이라도, 세차게 돌아간 고개가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몇 번 더 먹먹한 귓가를 때렸다.
-가슴이 답답하여 그랬습니다.
붉어진 눈을 부릅뜨고, 그보다 더 짙은 빛의 핏줄기를 흘려내는 입술로 저를 탓한다. 애초에 약조를 어긴 것도, 도망하고 싶게 옥죈 것도 모두 저라 소리 없이 외치는 윤에게 왕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어차피 너는 내 것이거늘. 왕은 반쯤 누워있는 윤의 멱살을 고쳐 쥐고 힘을 주어 당겼다. 기우뚱한 몸이 버티려다 말고 체념한 듯 맥없이 딸려온다.
윤을 제 말에 태운 왕은 그 뒤에 바싹 붙어 앉아 궁을 향해 달렸다. 눈앞에 보이는 기다란 목덜미에 당장이라도 이를 박아 넣고 싶다. 겹겹이 덮인 옷자락 안에 감춰진 매끈한 살결을 제 흔적으로 물들이고 싶다. 얌전히만 굴면 온 세상이 네 것이 될 터인데 어찌 이리 속을 썩여. 왕은 허리를 감아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네 마음 따위야 무엇이든 활을 쏘아서라도, 불구로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짐의 옆에 묶어둘 셈이다.
왕은 윤을 처소에 던져둔 채 수십의 병사를 세워 그 앞을 단단히 지키라 이른 뒤 대전에 들었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적이 누굴 노렸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였다. 윤을 해할 목적으로 말의 다리를 쏘았던 것인지, 왕인 저를 목적으로 접근했다 실패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경계를 더 강화하라는 명을 내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일찍 침전에 들었으나 잠이들기는커녕 눈조차 감기질 않는다. 왕은 금침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아 미간을 구긴 채 윤을 떠올렸다. 저를 두고 거침없이 달려나가던 뒷모습은 잊을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제 신변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는 것보다도 윤이 저에게서 벗어나려 했단 사실에 더 분노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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