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조윤 150709-01
-윤아 어서 나와보아라. 짐이 커다란 멧돼지를 잡아 왔느니라.
-빈마마가 저쪽으로 사라진지 한참 되었나이다.
말에서 뛰어내려 흐뭇한 얼굴로 막사로 향하는 왕에게 다가온 심복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다. 아니, 오히려 도망하도록 놔두라 명하였다. 이 조선 땅에서 어디로 달아난다 한들 짐의 손바닥 안이 아닌가. 저를 쫓는 것이 한낱 유희거리임을 알지 못하는 윤이 아둔하게 느껴져 끌끌 혀를 찼다. 대군 시절, 그 총명함에 혀를 내두른 적이 수없이 많았건만 어찌 저리 변한 것인지. 물론 그리 만든 이는 누구도 아닌 왕 자신이었다.
-슬슬 찾아 나서거라.
아무리 애원해도 자비 없이 몰아치던 왕에게 밤새 시달린 윤은 잠이 든지 한 시진도 채 되기 전에 몽롱한 상태로 사냥터에 끌려 나왔다. 내 오늘 빈에게 꼭 커다란 놈을 잡아다 줄 것이니 기대하고 있으라. 서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저와 달리 가슴팍을 탕 치며 눈을 찡긋하는 왕은 지치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이를 악문채 공손히 읍한 윤은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기진한 몸을 침상에 기대기 무섭게 잠이 쏟아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려 주위를 훑던 윤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저를 감시해야 할 왕의 호위무사들이 꽤나 떨어진 거리에 모여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행동에 의문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제 쪽을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왕이 향한 숲의 반대편으로 절로 발이 움직였다. 동이 틀 때까지 혹사당해 후들거리는 다리가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윤은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며 제 오른쪽 허리에 찬 검을 움켜쥐었다.
거사를 치르기 두 달여 전 수양의 사저는 한밤중에 습격을 받았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수양을 향해 퍼붓는 화살을 쉴 새 없이 쳐내던 윤은 오른쪽 어깨가 뚫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애써 무시하며 제 주인을 보호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으나 점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간신히 버티던 윤이 쓰러지기 직전 적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수양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나 독화살을 맞은 윤은 온몸에 독이 퍼져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게 되었다. 장안에 이름난 명의는 모두 불러 모아 치료한 덕에 목숨은 구했으나 화살을 직접 맞았던 오른쪽 어깨는 시일이 지나도 제 기능을 하기는 힘들다 하였다. 제 몸 하나 지키는 것이야 왼팔만으로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 무관이 아닌 자의 기준에서였다. 윤은 머지않아 치러질 거사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말리는 수양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버지 조대감은 윤이 무과에 급제하여 한양으로 떠날 때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으나 대군의 측근이 되었다는 서신에는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태도로 성심껏 모시라는 기대 이상의 답까지 보내왔다. 하지만 열매를 맺기도 전에 성치 않은 몸으로 돌아온 서자에게 향하는 시선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매서워져 윤이 방을 나서기도 두렵게 만들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서책이나 들추며 시간을 보내던 윤은 수 년 만에 직접 저를 찾아온 아버지에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조대감은 상석을 내주는 서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툭하니 말을 내뱉었다. -혼담이 거의 성사되었으니 천박하게 굴지 말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거라. 윤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방을 나섰다. 굳이 묻지 않아도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늙은이의 첩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지금이라도 대군께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고민에 잠 못 이루던 윤에게 새 세상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드디어 대군께서 대업을 이루셨구나. 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과 기쁨이 한데 섞여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언제든 돌아오라던 수양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과연 제가 쓸모가 있을까, 이제 지존이 되신 대군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윤에게 한양으로 급히 돌아오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대군, 아니 왕은 부드럽게 웃으며 윤을 맞았다. 감격하여 절을 올린 윤의 앞에 붉은 용포 자락이 휘날렸다. 왕은 다정한 손길로 촉촉이 젖은 윤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윤아 내 너를 이리 부른 것은 후궁 첩지를 내리기 위함이다. 너는 짐의 생명의 은인이 아니냐. 인두겁을 쓰고 어찌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있으리. 하물며 이젠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짐을 구하느라 잃은 네 능력이 아까우나 곁에 두고 싶어 이리 결정하였으니 짐의 마음을 거부하지 말라.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머리가 멍했던 윤은 금세 이성을 되찾았다. 단지 동경하고 주인으로 모실 뿐이었지 사내로 연모한 적은 없었지만 이제껏 저를 진심으로 대해주고 능력을 높이사 분에 넘치는 대우를 했던 수양이었다. 어차피 무관으로 살기는 틀렸으니 별 볼일 없는 양반네의 첩으로 팔려가는 것보다야 저를 아껴주는 왕의 후궁이 되는 것이 아무래도 낫지 않겠나 싶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