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조윤 150401-01
윤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겠냐는 물음에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했다. 며칠 전부터 저를 괴롭히던 두통은 예식이 진행되는 내내 그 강도가 점점 심해졌다. 사회자의 목소리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주례사도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인식되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한 아버지의 눈짓에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도 그 순간뿐, 금세 아래로 쳐진 입꼬리는 쉽게
올라오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붙든 단단한 팔이 아니었다면 어지러운 머리는 저를 이미 바닥에 쓰러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제 상태에 도통 관심이 없는 듯 옆구리를 찌르며 킥킥대기만 했다. 스무 살에 약혼한 이후로 오늘만 학수고대하다 원하던 걸
드디어 손에 넣게 된 셈이니 입이 찢어져라 웃는 얼굴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 대상이 저라는 것이 끔찍할 따름이다. 설령
윤이 니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갈 앞날이 깜깜해서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말한다 한들 영화는 꿈쩍도 하지 않을 테지만.
둘의 대조된 표정은 구구절절한 짝사랑 끝에 결혼에 성공한 남자와 썩 내키지는 않아도 그 구애를 결국 받아준 상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윤영화와 조윤은 그저 집안끼리 맺어진 것일 뿐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이였다. 니 얼굴만 보고 약혼한 거라느니, 오빠를 위해 졸업 때까지 몸 간수 잘하라느니, 재수 없는 말만 내뱉으며 음흉한 눈길을 4년 내내 보낸 영화에게 윤이 손톱만큼의 정도 느끼지 못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식이 끝나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사람들 몰래 아버지에게 한 소리 듣긴 했지만 피로연도 별 탈 없이 치러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거였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거나, 이 결혼은 무효라고 사람들 앞에서 대대적인 선언이라도 했다면 적어도 지금 윤영화의 옆자리에 앉아있진 않았을 거다. 이렇게 허벅지로 향해오는 양심 없는 손을 쳐낼 필요도 없었을 테고.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윤은 불가능한 가정을 해본다.
정식 부부가 된 첫날 신혼여행 따위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던 둘에게 남은 건 이제 하나뿐이었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던 신혼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영화를 피해 서재로 숨어들었다. -우리 사이에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나 씻을게, 너도
씻고 나와라. 윤은 능글대는 영화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커다란 창 앞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억지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아직도 거기 있는 거야? 빨리 안 나오고 뭐 해?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만 기다렸는데. 제대로 씻기나 한 건지, 아니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쨌든 영원히 계속되길 바랐던 희미한 물소리는 원망스럽게도 금세 끊어지고 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보채는 한껏 들떠있는 음성만이 귀를 때린다.
윤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러가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사그라들었던 두통이 다시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문밖에서 한참을
어르고 달래다 결국 욕설을 내뱉은 영화가 문을 부술 듯이 걷어차는 바람에 윤은 결국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던 영화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윤을 다짜고짜 침대로 밀어 눕히고는 거부의 말을 뱉으려 작게 벌어진 얇은 입술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드디어 맛본 말랑한 혀가, 좁고 따뜻한 입안이 너무도 달콤했다. 정신없이 혀를 놀리던 영화는 숨이 차오른 윤이
제 어깨를 수차례 쳐댄 후에야 아쉬움을 접고 겨우 입을 떼었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이 제가 만든 작품이라는 생각에
영화는 어느새 좀 전의 분노를 잊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호흡을 고르던 윤은 영화의 시선이 향한 곳이 제
입술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손을 들어 거칠게 문질렀다. 미소를 띠고 있던 영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뭐야? 내 입이 더럽다는
거야 지금? 영화가 말없이 노려보는 윤의 셔츠 안으로 불쑥 손을 넣었다. 기겁한 윤이 손목을 잡아 빼내자 기가 막혀 혀를 찬
영화가 다시 손을 내밀었지만 매섭게 쳐낸 윤이 더 빨랐다. -야 우리가 좀 아까 뭐하고 온 지 벌써 잊었냐? 내가 누군지 몰라? 니 남편이라고. 눈빛이 변한 영화가 옷을 벗겨내는 순간 윤의 주먹이 영화의 뺨을 정확히 가격했다. -이게 진짜, 아 시발 됐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린 영화는 저를 쏘아보는 윤을 세게 밀치고 방을 나섰다.
그렇게 집을 나간 영화는 결국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결혼까지 한 마당에 좀 심했나 싶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몸만 원한다 노래를
부르던 영화에게 순순히 맞춰주기는 싫었다. 저야 경험이 수도 없이 많겠으나 (아무리 애정을 토대로 한 관계가 아니라 해도 윤은
그것부터 기분이 나빴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윤은 왠지 겁이 났다. 직접 몸을 부딪쳐오는 영화의 행동은 이미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결국 첫날밤에 쫓겨난 꼴이 된 영화는 생각지도 못한 봉변을 당한 셈이니 단단히 화가 났을 테지만 따지고 보면 제가
자초한 일일뿐이다. 영화 따위야 알 바 아니었으나 윤은 금세 머릿속을 채우는 다른 얼굴에 터질듯한 입술만 깨물었다. 혹시라도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다면 말 한마디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제 의사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건 영화의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