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조윤 150928-05
일단 아이의 명줄은 늘려놓았다. 하지만 매일 밤 꿈에서 저를 안아주던 그리운 얼굴은 나타나는 횟수를 차츰 줄여가더니 언젠가부터 머리카락 한 올도 보여주질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하여도 탈이 난 게 아닌가 싶어 불안감은 커져갔다. 산달은 다가오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게다가 서인에게 겁간을 당한 날은 아이가 생긴 때와 두 달 가까이 차이가 난다. 다 자란 아이를 칠삭둥이로 우길 수야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나오는 시기를 늦춰야 했다. 가끔 들러 상태를 확인하는 조대감은 마른 몸을 볼 때마다 혀를 찼다. 윤을 직접 닦달하지는 않았지만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의원을 다그치곤 했다. 기력이 없으면 순산하기 어렵다는 말에도 윤은 아이가 제때 나올까 두려워 먹는 양을 크게 늘리지 못했다.
초저녁부터 이른 잠에 빠졌던 탓일까? 윤은 귓가를 자극하는 숨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희미한 달빛 아래 저를 바라보는... -형님. 내밀어진 손을 매섭게 뿌리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잔에 불을 붙인 서인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에 마주한 몰골은 가관이었다. -귀양살이라도 하고 온 모양새구나. 날이 선 말투에도 서인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그저 윤이 저를 무시하지 않고 말을 건네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서인은 좀 더 가까이 다가앉아 윤의 손을 덥석 쥐었다. 그러고는 놀란 윤이 뭐라 하기도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못난 아우 때문에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아버지께 제가 그리 한 것이라 말씀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이제 아무 걱정 마시고 우리 아이를 순산하는 것에만,
-뭐, 뭐라? 우리 아이라 했느냐? 네놈이 감히,
들어 올린 손은 뺨에 닿기 직전에 그대로 멈추었다. 제게는 원수이나 아이의 은인과도 같은 이다. 보복은커녕 절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라 헛웃음이 났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자 질끈 감겼던 두 눈이 슬며시 열렸다. 허공에 떠있는 윤의 손을 잡아 내린 서인은 제 손을 겹친 채로 불룩한 배 위에 올렸다. -힘차게 뛰노는 것이 꼭 사내아이 같습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 저를 졸졸 따르던 어릴 때와 다르지 않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서인은 수시로 윤의 처소를 들락였다. 듣도 보도 못한 과일을 내밀며 맛을 보라 종용하기도 하고 아기에게 입힐 법한 옷을 구해왔다며 방안 가득 늘어놓기도 했다. 신이 난듯한 얼굴이 누가 보아도 아이를 기다리는 아비의 그것이라 그 위에 수양을 덧씌워 바라보곤 했지만 그리움은 더해만 갔다. 물론 냉정히 쳐내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은 아니었다. 화를 쏟아냈다가 그렇게 끔찍한 걸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냐 물으면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서인의 마음 따위는 얼마든지 이용해줄 작정이었다.
반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밀어내지도 않는 윤이 저를 받아들인 거라 여겼는지 서인은 틈만 나면 몸을 맞댔다. 손을 붙잡는 건 예사였고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척 배를 쓰다듬다 도포자락 위로 입술을 묻은 채 슬쩍 허리를 껴안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이를 악문 채로 제 무릎 위에 슬쩍 엎드린 서인의 등을 내려다보며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조는 일이 잦아졌다. 분명 서책을 읽고 있었건만 입술을 때리는 아릿한 통증은... 열기가 그득한 두 눈이 희미한 시야를 가득 채웠다. 피부에 와 닿는 뜨거운 숨결에 소름이 돋아났다. 조금도 물러나지 않은 채 역한 웃음을 짓는 얼굴이 벌겋다. -분명 형님이 댄 겁니다. 윤은 뒤로 물러나 앉으며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대낮부터 술을 마셨거든 곱게 쓰러져 잠이나 잘 것이지 어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윤은 금침 위에 쓰러졌다. 그대로 팔을 들어 막아내려 했지만 서인은 기어코 제 목적을 이루고야 말았다.
정신을 아예 놓았던 것은 아닌지 그날의 만행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다 해도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려운 것이지 두 번은 너무도 쉽다. 게다가 윤의 거부라는 것이 서인에겐 아양에 불과한 수준이라 오히려 더 부추기는 꼴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수시로 입을 맞추는 것으로도 모자라는지 옷깃 새로 손까지 넣어 주물러대는 통에 그대로 뒀다간 언제 더한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윤도 방법을 터득해냈다. 아무리 저라도 만삭의 몸을 욕정껏 취할 수야 없을 테니 입을 맞추다 밀어 눕히려 할 때쯤 배가 아픈 척 신음을 흘려내면 되었다. 그에 놀라 몸을 떼어내고 이리저리 저를 살피는 얼굴엔 걱정보다 아쉬움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