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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조윤 160106

dbsldbsl 2016. 1. 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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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화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요기가 약해 결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음. 아이에게 세상이란 넓지 않은 집 한 채와 그 뒤에 딸린 아담한 숲뿐. 아주 먼 옛날, 화담은 잠시 인간과 정을 통했던 적이 있었는데. 여인은 한 번의 정사만으로 회임을 했고 부른 배를 감추지 못해 집안에 들키고 말았음. 처녀가 애를 뱄으니 사달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지. 결국 달도 채우지 못한 채 억지로 낳다 죽었는데 화담은 뒤늦게 그걸 알고 애만 겨우 훔쳐 왔음. 제 어미의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 작은 몸 안에 흐르는 건 저와 같은 녹색이 분명했지.

근데 지금 바로 그때 맡았던 달달한 향이 코를 찌르는 거. 급하게 집 주위를 살피자 대문이 열린 틈에 새어나간 단내를 맡은 하급 요괴들이 한껏 몸을 부풀린 채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음. 부채를 휘둘러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털어내고서도 화담은 찡그린 얼굴을 펼 수가 없었지. 신경을 긁는 요란한 소리들이 사라져 희미한 달빛과 적막만 남은 마당에서 한참을 그대로 서있던 화담. 제 기척을 뒤늦게 알아차린 아이가 방문을 나서는 걸 보고서야 천천히 발을 뗌. 말없이 제게 길을 내준 아이를 스쳐 지나 방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건 곤히 잠들어 있는 평온한 얼굴. 굳이 묻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었지. 반쪽 인간인 아들보다 배는 진한 향. 아이는 아들이 데려온 완벽한 인간이었음.

어릴 때는 그림을 그리거나 작은 동물을 친구 삼아 놀던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바깥세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함. 인간계를 보여주는 연못가에 하루 종일 앉아있는 날이 늘어가더니 제게 무언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기도 하고. 피는 못 속이는구나 싶어 화담은 아이에게 네 어미는 인간이었다 말해줌. 그다지 놀라는 것 같지 않았음. 제가 아비와 다르다는 것쯤이야 아이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는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세상에 가보고 싶다고 함. 화담은 당연히 말렸음.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데다 완전한 인간도 요괴도 아니라 어딜 가도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비만큼 자라면 보내주겠다며 잘 어르고 달랜 후 며칠 집을 비웠다 돌아와보니 아이가 온데간데없음.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결계를 샅샅이 살피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건 오래전 아이에게 줬던 제 피로 만든 구. 집안에 얌전히 있으면 웬만해선 위험해질 일이 없지만 만일을 대비하여 만들어 둔 것인데. 그걸 삼킨 아이는 저와 같은 정도의 힘을 잠시나마 갖게 되어 인간계로 내려가 버린 거.

거칠었던 호흡이 진정될 즈음 주위를 둘러보니 그토록 그려왔던 인간 세상임. 초인은 배어 나온 땀을 닦아내며 살며시 웃었음. 도착하자마자 삼켰던 구가 절로 몸 안에서 튀어나와 힘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별문제가 되지 않았음. 언제든 돌아가고 싶을 때 다시 삼키면 되니까. 그런데 늘어졌던 몸을 일으키는 순간, 기우뚱하다 넘어질 뻔함. 완전한 인간도 요괴도 아니라 어딜 가도 약한 존재일 거라는 아비의 말은 이런 의미였나? 다리 하나가 말을 듣지 않는 거. 그래도 힘들게 온 곳인데, 다시는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음. 그래서 초인은 불안한 걸음으로 장터부터 구경하기 시작함. 별다를 것도 없는데 작은 연못 안에서만 벌어지던 일들이 이렇게 생생히 피부로 와 닿으니 뭐든지 놀랍고 신기했음.

동네 아이들이 도깨비라며 놀리는 말에 흠칫 굳긴 했지만 그건 단지 제 머리모양 때문이었고 그래도 요괴로 보이지는 않는지 불편한 다리를 힐끗대는 시선 외에 다른 건 없었음. 정신없이 돌아다니나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웬 대궐 같은 집 처마로 들어간 초인은 젖은 머리를 털어내다 쪼그려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함. 아이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눈물로 범벅된 작은 뺨은 벌겋게 부었고 얇은 입술엔 피도 맺혀 있었음. 안쓰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다가갔더니 얼른 제 바지자락을 붙드는 작은 손. 왜, 왜 이래? 떼어내려고 하자 아이는 더 센 힘으로 아예 다리를 움켜쥠. 작은 몸을 차마 쳐낼 수가 없어서 그대로 불편한 다리에 매달아 둔 채 초인은 팔을 뻗어 난생처음 접한 비를 온몸으로 느낌. 팔을 뻗어 손바닥을 적셔보고, 혀로 핥아도 보고, 땅바닥에, 지붕에 부딪히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임. 그러다 보니 어느새 빗줄기가 약해져 있었음. 아, 그제야 아이가 생각나서 시선을 내리자 비스듬히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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