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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조윤 1593-01

dbsldbsl 2015. 12. 2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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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내내 앞을 향해 있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텅 비어있는 긴 복도는 매일 오가던 곳인데도 왠지 낯설다. 잠시 망설이던 윤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다시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교실이 아닌 5층, 옥상이다.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이 답답했지만 다리가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삐걱이는 몸이 제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분명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 윤은 한참만에 겨우 육중한 철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리자 덜컹대며 벌어진 틈이 천천히 시야를 채워간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좀전까지만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던 다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침없이 끝을 향해 움직였다. 윤은 벽에 부딪히기 직전 팔을 뻗어 난간을 짚고 가까스로 멈춰 섰다. 전력질주라도 한 듯 거친 숨이 쏟아진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걸 참아가며 가슴을 기댄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썰렁한 교정만 눈에 들어왔다. 아직 등교하기엔 이른 탓이다. 평소의 저라면 아직 집을 나서지도 않았을 새벽.

차디찬 바람에 얼굴이 시렸다. 윤은 성한 곳 없는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걸 애써 무시하고 조심스레 난간 위로 올랐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차마 일어날 용기까지는 없어 그저 쪼그려 앉은 채였다. 구부정한 자세로 난간을 있는 힘껏 붙든 제 모습에 기가 찼지만 숨까지 멈추고 가까스로 다리 한쪽을 펴 걸터앉았다. 덜덜 떨리는 게 제 눈에도 뚜렷이 보인다. 그렇게 두 다리 모두 난간 밖으로 내민 후에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허공에 떠있는 발을 살짝 흔들자 난간을 붙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더욱 힘이 들어갔다. 두려움은 도통 사라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이대로 죽어 없어지면 아버지가... 아니 저에게만 냉정했던 얼굴이 처음으로 저 때문에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은 아직도 기대를 버리지 못한 제가 한심해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지만 어색한 웃음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천천히 눈을 감자 거세진 바람만큼 어지러움도 한층 심해졌다. 그래 지금이면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대로 몸을 맡기고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되는 거다. 조금만...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던 윤은 갑자기 허리를 잡아채는 강한 힘에 추락했다. 물론 앞이 아닌 뒤로.

-아...

귓가에 울리는 낮은 신음에 윤은 제가 누군가의 몸에 올라앉아있는 걸 깨닫고 얼른 일어섰다.

-진짜로 죽을 생각이면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조용히 뒤져. 이런 데서 쇼하지 말고, 조윤.

그대로 상체만 일으켜 담배를 빼어 무는 얼굴이 익숙했다.

-니가 무슨 상관인데, 송지원.

제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걸 알아채기도 전에 눈앞은 뿌옇게 변했다.



짙은 색으로 물든 시멘트 바닥은 금세 제 모습을 되찾는다. 지원은 반쯤 남은 담배를 대충 눌러끄고 몸을 일으켰다.

-으...

부딪힌 허리가 삐끗했는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요란스러운 움직임에도 꿈쩍 않고 정수리만 보이는 윤을 빤히 응시하던 지원은 늘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손을 넣어 작은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하지만 마주한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일그러졌다. 발간 눈가나 축축이 젖은 뺨은 예상대로였으나 희미한 멍 자국에 피딱지가 맺힌 입술이라니. 뒤늦게 제 상태를 의식하고 흠칫 놀란 윤이 고개를 돌리려는 걸 힘주어 붙든 지원은 미간을 구긴 채로 엉망인 얼굴을 이리저리 훑었다.

-이거 놔.

단 한마디뿐인데도 가느다란 떨림이 숨김 없이 드러난다. 손을 쳐낼 생각도 하지 못한 듯 굳어 있는 턱을 놓아준 지원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한 대 줄까?

얇은 입술 틈으로 담배를 밀어 넣자마자 퉤 뱉어내곤 힘껏 저를 쏘아보는 눈이 매섭다.

-그런 거 안 해.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바닥을 구르는 담배를 주워드는 모습을 눈으로 좇던 윤이 얼른 고개를 돌려 아닌 척을 한다. 어깨만 살짝 스쳤을 뿐 그대로 저를 지나쳐간 지원은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있다.

-싫으면 말고.

무덤덤한 울림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크지 않던 발소리가 문 뒤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윤은 언 손을 들어 얼굴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잊고 있던 통증이 되살아나 신음이 절로 뱉어진다. 결국 오늘도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지원의 방해 때문이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과연 제가 실행에 옮겼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선 윤이 기운 없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옥상을 벗어난다.



-아...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깨달았다. 방금 전 마주하고 있던 얼굴이 제 옆자리였다는 것. 한 달 넘게 붙어앉아 있었지만 말을 섞은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는 것도. 무려 지금은 일 년의 끝자락, 겨울방학을 코앞에 둔 시점인데 말이다. 윤이 조심스레 의자를 빼내어 앉는 동안에도 지원의 꼿꼿한 등은 미동조차 없었다. 흠흠, 괜한 헛기침을 해본다. 역시 꿈쩍 않는다. 자꾸만 신경이 쓰여 옆을 힐끔대던 윤은 수업이 시작된 후에도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왼팔, 필기 중인 오른손, 사라락 책장 넘기는 소리에 모든 감각이 곤두선다. 하지만 지원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제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할 말 있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제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지원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한 채로 조용히 입을 연다.

-아니!

흠칫 놀라 크게 내지른 답에 수십 개의 시선이 쏟아졌다.



타이밍도 절묘하게 수업이 끝나는 바람에 지적을 당하는 난감한 상황은 겨우 면했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올랐다는 걸. 윤은 빤히 저를 응시하는 지원을 뒤로하고 얼른 책상 위로 엎드렸다. 뒤통수에 와 박히는 시선이 느껴져 아무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두 눈을 꾹 감았다. 환한 어둠 속에서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켜본다.

몇 분이 지났을까,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채로 애써 자는 척을 하려는 윤의 귓가에 의자를 밀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바람도 일었던 것 같다. 옆이 비었다는 확신이 들자 빠르게 울리던 심장박동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숨을 길게 내쉰 윤은 다시금 지끈대기 시작하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심상치 않은 열기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지원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제 상태는 어제부터 정상이 아니었다. 얼굴의 상처를 보고 놀랐던 지원이 옷으로 가린 부분을 보면 어떤 표정을 하려나. 어지럽고 아프다. 윤은 부르르 떨리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곧 수업이...



골이 울린다. 공중에 붕 떠있는 것만 같다. 흔들지 마, 그만. 어지러워.

-일어나.

익숙지 않은 목소리에 갑자기 눈이 떠졌다. 뿌옇게 보이는 광경은 익숙한 제 방의 것이 아니다. 급하게 몸을 일으킨 윤의 등 뒤로 스르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삐죽 나온 팔이 그것을 집어 들어 툭툭 턴다. 제 것과 같은 교복 재킷. 눈을 깜박여 보아도 머리는 여전히 멍한 게 꿈 속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자.
-어, 어?

그제야 윤은 주위를 둘러봤다. 텅 빈 교실엔 단둘 뿐이었다.

-수...업은?
-끝났지.

단추를 채우는 지원을 보며 대충 짐을 챙겼는데, 분명 손에 들고 있던 제 가방이 어느새 지원의 어깨에 매달려 있다.

-줘.

윤은 들은 체도 않고 걸음을 빨리하는 지원을 급하게 따랐다. 그저 몇 발짝 걸었을 뿐인데도 정상이 아닌 몸엔 버거운 움직임이었던 모양이다. 금세 현기증이 일었다.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자 저만치 멀어져 있던 지원이 돌아온다. 몸을 세우기도 전에 이미 팔 하나가 붙들려 있었다.

-괜찮으니까 놔.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복도는 너무나도 길었다. 아침에 보았던 그대로. 윤은 대꾸 없이 저를 부축한 지원에게 끌려가다시피 했다. 후들대는 두 다리가 마지못해 움직이고 있지만 알고 있다. 아까와 달리 지원이 제 속도에 맞춰 걷고 있다는 걸.



교문 앞 정류장. 대낮임에도 비라도 쏟아질 듯 어두운 탓일까. 주변은 여느 때와 달리 한산했다.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자 얇은 바지 아래로 급격히 냉기가 스며들었다. 옷깃 새로 고개를 파묻었지만 아무리 입술을 물고 힘을 주어도 이미 열이 오른 몸은 자꾸만 떨린다. 윤은 옆으로 바짝 붙었다. 허벅지가 닿고 팔이 스치는 순간 아주 잠깐 망설였던가... 모르겠다. 어쨌든 전해지는 온기는 분명 얼마 되지 않는데도 금세 떨림이 잦아들며 호흡이 진정된다. 무거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저와 같은 높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나? 윤은 어느새 등 뒤로 둘러진 팔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 움직임에도 아랑곳 없이 지원의 손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며 팔을 부드럽게 문지른다. 멍했던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윤은 숨도 멈춘 채로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렸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어제까지 말 한번 나눠보지 않은 사이였다지만 내외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골골대는 옆자리 놈 도와주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게다가 방금 전까지 저 팔에 부축 받아 한참을 걷지 않았던가. 윤은 뻣뻣하게 굳은 그대로 고개만 떨구었다. 뭔지 모를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정신이 없었다.



-어디야, 집?

간간이 지나가는 차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하기까지 한 도로 앞. 분명히 알아들었지만 윤은 꾹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오늘만큼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제가 움찔대는 걸 분명히 봤을 지원도 더는 말이 없었다. 윤은 그저 나란히 붙어 있는 네 개의 무릎만 번갈아 응시했다.



-버스 왔어.

그 새 잠이 들었었나. 나직한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도 팔을 쓸고 있던 손이 힘을 주어 저를 일으키고는 버스 위로 밀어 넣는다. 휘청휘청 걸어가 빈자리에 앉은 윤은 점점 가까워지는 지원에게서 고개를 돌려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달리는 버스 뒤로 익숙한 건물들이 사라져간다. 창에 희미하게 비친 지원은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바깥에서와 달리 둘 사이엔 좁지 않은 틈이 생겼다. 지원과 맞닿은 부분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자 갑자기 팔이 시리다는 생각이 든다. 윤은 아까 지원이 하던 대로 손을 들어 팔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훈훈한 공기가 주위를 부유하는 버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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