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형배조윤 151203-02

dbsldbsl 2015. 12. 12. 22:53
반응형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처음 이틀간은 그랬다. 휴대폰을 확인하는 빈도가 잦아진 것을 제외하면 부쩍 쌀쌀해진 날씨 탓에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는 것 정도? 밥은 먹었냐는 물음에 아직, 이란 답을 보냈고, 별일 없냐는 질문엔 응, 한 글자를 전송했다.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사진엔 그마저도 않았다. 이전과는 같지만은 않은 관계임이 분명한데도 그랬다. 그랬는데... 지이~ 진동은 채 한 번을 다 울리지 못한다. 늘 손에 쥐고 있으니 반응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는 거다. 문자를 눈에 담기도 전에 입꼬리부터 올라갔다. 내일 갈끼다, 밥 잘 묵고. 익숙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울리는 것 같다. 얇은 입술이 좀 더 팽팽해졌다.

그리 짧지 않은 일주일 동안 윤은 달라진 제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받았던 전화를 어느새 기다리고 있었고, 이미 확인한 문자를 서너 번은 더 들여다보았다. 자제하지 않았다면 그 횟수가 십수 번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 없는 방 주변을 괜히 한번 지나쳤고 보는 이 하나 없음에도 몰래 문을 열어 숨을 들이쉬었다. 비릿하고 쌉쌀한 형배 특유의 향을 맡으면 허한 가슴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쭈욱 기지개를 켰다. 원래도 넓었던 집이 황량하게까지 보이던 게 바로 몇 분 전인데 이제는 좀 덥다 싶다. 윤은 내내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고 이제 겨우 접어든 늦가을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올려두었던 온도를 적당히 조절했다. 문제는 계절이 아닌 마음이었다. 주위를 부유하던 냉기는 이미 사라져있었다.

거울 보며 얼굴도 점검하고 도우미가 청소 다 해놓고 간 집안 괜히 둘러보고. 설렘에 뒤늦게 잠든 윤이 살짝 깼는데 오싹한 기운에 눈을 뜰 수가 없어라. 집 앞은 형배 똘마니들이 지키고 있고 형배가 벌써 올리는 없는데 누구지? 궁금한데 아무래도 눈으로 확인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계속 자는척함. 그건 지원이였고. 형배 몰래 몇 시간 일찍 와버린 거. 출장 가서도 시간 억지로 내서 윤이 줄 선물 고르고 혼자 웃고 아주 별 짓을 다하니까 욱해서 무작정 오긴 했는데 아무도 모르게 윤이 없애버리고 싶지만 차마 그것까진 할 수가 없어서 아쉬운 대로 형배 홀려먹은 얼굴이라도 망쳐버릴까 하곤 칼 갖다 대고서도 결국 털끝 하나 베지 못하고 그냥 나가버렸겠지. 윤이 그냥 감으로 알았던 거여라. 지원이인 거. 저한테 그렇게 살기 드러낼 사람이 지원이뿐이니까. 진짜로 목 딸까 봐 이불안에 감춰둔 주먹은 꽉 말아 쥔 채로 등줄기는 축축하게 젖어드는데, 자는 척하느라 숨 애써 고르게 내쉬는 것에만 온 신경 다 집중하고. 자꾸만 떠지려는 눈에 힘주고 있다가 지원이 나가는 소리 듣고 나서도 한참 후에 몸 일으킨 윤이. 뺨에 와닿던 소름 돋는 느낌이 또 떠올라서 부르르 떨다 눈물 주르르 쏟았겠지. 맨날 저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새끼. 누군 좋아서 여기 이러고 있는 줄 아나. 사양하고 싶은 게 누군데.

그래서 윤이는 열리려던 마음 다시 닫은 채로 형배랑 재회함. 형배는 그런 윤이 보고 어리둥절하겠지. 그래도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있던 윤이인데 다시 처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냉랭해진 분위기에 말 한번 건네기도 쉽지 않고. 어제 사라졌던 지원이가 또 뭔 짓 한거 아닌가 의심하는데 윤이한테 물어도 아무 말 안 하고 알리바이도 확인돼서 속만 태워라. 윤이는 멀쩡히 살던 제 신세 망친 놈(사실 그건 엄밀히 따지면 아버지지만 원망을 쏟아낼 상대가 저 데려온 형배뿐이니까)한테 어느새 슬슬 경계심 풀던 제가 기가 막혀서 일부러 더 차갑게 대하고 눈길도 안 주고.

그러다 늘 말끔한 모습만 보이던 형배가 하루는 피 냄새 풍기며 나타나는 거. 소파에서 졸다 깬(기다려놓고 아닌 척) 윤이 코 틀어쥐고 얼른 방으로 향하는데 형배가 잡아채라. 왜, 왜 이래? 뿌리치고 뒤돌아가려는 윤이한테 달려들어 입부터 맞추는 형배. 평소와 다르게 힘으로 밀어붙이니까 윤이 꿈쩍도 할 수가 없는 거. 비릿한 냄새도 끔찍하고 여기저기 피 튀어있는 손으로 제 얼굴 으스러져라 쥐는 힘도 무서운데 다짜고짜 옷 헤치기 시작하는 손길이 너무 거칠어서 눈물 터짐. 하...지마... 떨리는 제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그대로 바닥에 눕히고는 바지부터 벗기는데 윤이 안된다고 버둥대다가 형배 얼굴 걷어참. 근데 형배 고개 다 돌아가기도 전에 윤이 뺨에 불이 번쩍하겠지. 처음으로 형배한테 맞은 거. 한대만으로도 머리가 멍해서 정신 하나도 없는데 몇 대 더 얻어맞고 늘어진 몸이 아래를 쑤시는 느낌에 파드득 튀어 오르겠지. 아프고 불쾌한 감각에 하지 말라고 사정하는데 그 뒤에 이어진 건 상상도 못한 고통. 윤이 목 터져라 소리 지르는 순간, 갑자기 쑥 빠져나간 흉기. 눈앞에 보이는 건 원래대로 돌아온 형배 얼굴이겠지. 오랜만에 직접 칼질하고 피에 취해 순간 이성 잃었던 거여라. 윤이 비명에 정신 차린 거고. 물론 맨날 따먹을 생각 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윤이가 허락할 때까진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는데 터져 나온 거겠지. 그런 속마음 포장해서 구구절절 변명해가며 윤이한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가 제 쪽으로 고개 한번 안 돌리는 윤이 두고 사라져서는 며칠 뒤에 나타나는데 수염은 덥수룩하고 눈 밑이 퀭해라. 말없이 바라보다 뒤돌아서 방으로 가려는 윤이 형배가 얼른 붙잡고 손에 칼 쥐여줌. 내 미운 만큼 찔러라, 니가 죽어달라면 죽어줄게. 윤이 제 손에 들린 칼 한 번 보고 형배 얼굴 한번 보고. 배에 푹 찔러 넣으려다 멈춤. 칼끝이 옷 사이로 좀 사라졌으니까 베이긴 했겠지만 그게 다겠지.

칼 멀리 던져버리고 내가 그렇게 좋아? 뭐가 좋은데, 왜 좋은데. 웅얼웅얼 묻는 윤이. 그냥 다 좋다. 윤이 니라서 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