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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조윤 150614-03

dbsldbsl 2015. 8. 17.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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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바쁘다던 윤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또 여자친구에게 차여 쓰린 속을 술로 달래는 모양이었다. 윤이 대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옆자리는 비기가 무섭게 채워졌다. 윤은 저에게 고백하는 여자는 일단 받아주고 나서 나 좋다는 사람 나도 좋아, 라며 그때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다. 결핍된 애정을 그렇게라도 메꾸는 듯했으나 문제는 얼마 안 가 늘 이별 통보를 받는다는 거였다. 그 잘난 얼굴로 허구한 날 차이는 것도 재주다 싶었다. 물론 짐작 가는 구석이 없진 않았으나 물어보면 새빨개진 얼굴로 난리칠 게 뻔해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또 차였냐? 으이구 얼굴이 아깝다 진짜. 그거 그냥 나 줘라.

-헤헤... 그럴까? 아... 역시 나한텐 너밖에 없나 봐. 내가 여자였으면 너랑 사귀는 건데.


윤이 늘 하는 주사에도 영화의 심장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지 어김없이 쿵쿵댔다. 그 소리가 윤의 귀에 혹시라도 들어갈까 몰래 손을 들어 눌렀지만 이미 늘어진 윤은 멀쩡한 상태였더라도 별 관심이 없었을 거다. 보는 이가 없는데도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숨을 내쉬며 길쭉한 몸을 둘러업은 영화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둔 제 차로 가는 시간이 짧게만 느껴져 최선을 다해 발을 천천히 움직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볼을 스치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윤을 바라보느라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든 영화는 정오가 가까워질 때쯤 느지막이 눈을 떴다. 그런 저를 반기는 건 옆에 고이 눕혀뒀던 윤이 아니라 텅 빈 침대 반쪽과 헤드에 붙어 있는 쪽지 한 장이었다. [어제는 미안. 먼저 간다. 연락할게.] 주인을 닮아 반듯한 글씨체를 흐뭇한 얼굴로 몇 번이고 다시 읽던 영화는 제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분명 어젯밤 눈에 띄게 홀쭉해진 윤의 뺨이 안쓰러워 뭘 해먹일까 고민하다 냉장고를 뒤졌건만 유통기한이 지난 쓰레기만 한가득이었다. 일찍 일어나 마트에 다녀와야겠다 다짐하고는 무엇보다 중요한 알람 맞추기를 잊어버렸다. 윤이 나가는 것도 모른 채 병신같이 잠이나 퍼자고 있던 저를 아무리 욕해봤자 이미 한참은 늦은 후회였다.




정신없이 기말고사를 치르고 드디어 종강을 하던 날, 영화는 혼자만의 기대로 부풀었다. 대학 와서 처음 맞는 방학인데 여행이나 가자고 할까? 어디가 좋을까? 외국으로 나가는 건? 우선 가볍게 우리 별장부터... 한껏 들뜬 채로 전화를 걸자 제가 입을 떼기도 전에 윤이 선수를 쳤다.


-어? 나도 지금 너한테 전화 걸려고 했는데. 야, 우리 텔레파시 통하는 거 아니야? 마침 할 말 있었는데 잘 됐다. 내일 너네 학교 앞에서 만나.


평소와 달리 우다다 말을 쏟아내는 윤 때문에 결국 여행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도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굳이 만나서 할 말이 대체 뭐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건 결국 하나였다. 설마... 정말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건가? 수년간 저만 바라보는 시선을 드디어 알아챈 윤이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라고... 으아아! 섣부른 기대는 하지 말자. 고개를 세차게 저어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눈을 아무리 세게 감아도 이미 들뜬 기분은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한 영화는 해가 뜨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고 샤워부터 했다. 구석구석 정성 들여 씻다 목욕재계라도 하는 듯한 제 손놀림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어이없는 행동은 욕실을 나온 후에도 이어졌다. 대체 뭘 입고 가지? 저번 생일 때 윤이가 선물해줬던 카디건이라도 걸칠까? 아 미친 눈 빨개졌잖아, 안경이 어딨... 선글라스로 가려야 하는 거 아냐? 한참을 허둥대던 영화는 어느새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과 거울에 비친 바보 같은 제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기대하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을 했건만 먼저 나와 있던 윤이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제 말 따위 절대 듣지 않는 심장은 또다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온몸을 휘감아도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두 번이나 삼킨 영화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윤의 앞에 마주 앉았다. 홀짝이던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만큼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할 말이 있다며 밝은 목소리를 내던 어제와 다르게 윤은 고개를 숙인 채 빨대만 잘근잘근 씹었다. 뭔데 저렇게 망설이지? 설마... 가까스로 눌러 놓았던 기대가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나 고백할 거 있어. 드디어 들린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영화는 제 귀를 의심했다. 고백이라고? 쿵쿵쿵. 튀어나올 기세로 뛰어대는 심장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뭐... 뭔...데? 태연한척하려 했지만 주인의 의지를 거스르고 제멋대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진작 말하려고 했는데 니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계속 고민하느라 연락도 자주 못했고. 작은 입이 뱉어내는 단어 하나라도 놓칠세라 영화는 눈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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